[이정 작가의 장편소설] 기억②

제 1장 삼지연 카페

이정 작가 승인 2020.09.16 10:18 | 최종 수정 2020.09.16 10:21 의견 0

작가 소개

 ▲이정: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경향신문에서 일하다가 2010년 늦깎이로 <계간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국경>(문화관광부 문학부문 우수도서), <압록강 블루>(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소설집 <그 여름의 두만강> 등이 있다. 등단 이후 북한과 북한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써 왔다. 1998년 이래 북한은 일곱 차례 다녀왔다. 현재 사단법인 공정세상연구소 소장, 통일문학포럼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압록강변에 선 작가. 건너다보이는 곳은 북한의 삭주군이다.


“우리 공화국에 언제 들어갔는데?”

“1985년 즈음.”

정현이 눈동자를 키웠다.

“어로공(어부)이었어?”

“아니. 무역회사 직원.”

“국정원 사람들이 요즘은 물불 안 가리는가 보디? NGO 활동가한테 기딴 일을 시키는 걸 보니까니.”

정현이 더듬이를 길게 뻗었다. 희철이 흣,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 가족이 찾는 거야.”

희철은 박신민이 누구라는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가려 하는 것을 꾹 눌렀다.

“찾아 줄 테야, 말 테야?”

“제 부하 다루듯 하네. 왜 찾는데?”

“가족이니까 찾지.”

“가족이 누군데?”

“찾으면 알게 돼. 더불어 아주 중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될 거야. 다음 일도 뒤따를 테고.”

희철은 정현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고, 더듬이에 향수를 뿌렸다.

“다음 일?”

“먼저 찾아보래도.”

“야, 와자자하다. 기럼 못 들어주디 머.”

정현은 짐짓 더듬이를 거둬들이는 척했다. 하지만 무슨 일일까 하는 정현의 궁금증이 부탁을 들어 주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희철의 고심보다 더 크게 작용할 것이라고 희철은 믿었다.

“자, 마시자.”

이번에는 희철이 맥주잔을 들어 정현 앞으로 내밀었다. 정현이 따라 들었다. 그들은 잔을 짹, 부딪쳤다. 생맥주를 들이키는 정현의 입 언저리에서 하얀 거품이 삐져나왔다.

“남쪽 사람 부탁을 들어 주다가 얼마 전에 작살난 사람이 있디. 조국해방전쟁 때 잡힌 국방군 유골을 남쪽 가족들의 부탁을 받고 몰래 빼 주었다가 걸린 사건, 희철 선생도 알디? 남쪽 신문에 솥뚜껑만 하게 기 소식이 실렸으니까니. 기 사람, 돈 몇 푼 먹으려다가 평생 관리소(정치범수용소)행 열차를 탔디 머.”

대화를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되겠는지 정현이 다시 더듬이를 뻗었다. 따져보면 부탁에 응하지 못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들어 줄 수 있으니 속을 확 털어놓으라는 과시였다. 정현 선생, 내가 바보가 아니야. 지금 내 속을 열면 괴물이 튀어나와. 당신은 이 일에서 천 리, 만 리 도망치고 말 거야.

“겁나면 그만둬. 하늘을 나는 새는 고사하고 장딴지에 기어오르는 거머리 한 마리도 잡지 못할 위인 같다.”

희철은 더듬이를 단칼에 잘라내는 척했다.

“에그, 못 들어줘. 못 들어준다고.”

희철은 정현에게 이미 입력된 정보가 원하는 답을 향해서 꼬물꼬물 자랄 것이라고 믿었다. 밤하늘에 까마득히 보이는 별에게 기별을 보내는 것처럼 여겨졌던 일이 비로소 지척에 다가온 셈이었다. 잘했어. 관문을 하나 더 넘은 거야. 그자를 찾아내서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다면 이 자리가 훗날 두고두고 반추할 인생의 한 매듭이 되겠지. 희철은 말아 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뺐다. 오늘은 정현과 제대로 된 술자리를 가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

저작권자 ⓒ 토요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