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 작가의 장편소설] 기억③

이정 작가 승인 2020.09.21 10:34 의견 0

작가 소개

 ▲이정: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경향신문에서 일하다가 2010년 늦깎이로 <계간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국경>(문화관광부 문학부문 우수도서), <압록강 블루>(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소설집 <그 여름의 두만강> 등이 있다. 등단 이후 북한과 북한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써 왔다. 1998년 이래 북한은 일곱 차례 다녀왔다. 현재 사단법인 공정세상연구소 소장, 통일문학포럼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압록강변에 선 작가. 건너다보이는 곳은 북한의 삭주군이다.


2.

“벌써 취했어?”

정현의 목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정현이 투덜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희철은 진즉 깨닫고 있었다. 벌써 두세 번 되풀이하는 말이었다. 희철은 자꾸 수그러드는 목을 추켜세웠다. 백주(白酒) 병이 코앞에서 흔들렸다. 정현이 병의 몸통을 쥐고 들이밀고 있었다. 그 역시 눈동자에서 초점을 잃었다. 옆에 앉은 강수는 테이블 귀퉁이에 아예 머리를 박았다.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던 뒤끝이었다. 영사관에서 돌아와 뒤늦게 합석했다. 희철은 자신의 빈 잔을 잡고 정현이 들이민 병의 주둥이에 잔을 댔다.

거리엔 어둠이 짙었다. 숨죽이고 있던 상가의 간판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화려한 원색의 불빛을 뿜어냈다. 어둑신한 카페 안의 벽과 테이블 위로 불빛이 알록달록 스며들었다.

“앞으론 그런 짓을 절대 하지 마. 끅. 주는 측에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망정 예의는 지키라고. 끄윽.”

희철은 트림을 섞어서 하던 말을 이었다. 대신 오늘은 더는 거론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목소리에서 힘을 뺐다. 오늘 역에서 지원물품 인수인계 작업을 할 때 정현과 강수는 물품이 담긴 상자에 붙은, 희철이 속한 단체인 희망나눔의 주소가 새겨진 스티커를 떼거나 매직펜으로 지웠다. 한국 지원물품임을 나타내는 다른 상표나 주소도 그렇게 했다.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인수인계 작업 때마다 이 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다.

“주는 측에서 생색을 내려들면 추하디 머.”

정현의 태도가 당당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미안함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언제나 이런 식의 말을 앞세워 궁색한 국면을 피해 나갔다. 남쪽의 다른 구호단체 활동가들에게서 주워들은 말일 터였다.

“누가 주는지는 알고나 받게 해야지. 은혜를 모르는 게 더 추해서 하는 말이야. 끄윽.”

사실 인도적 지원에는 수혜자가 누구냐가 문제지 시혜자가 누구냐는 큰 문제가 아니다. 희철의 전임자들 또한 활동가의 도리를 상기하면서 정현과 강수의 소행에 마지못해 눈을 감았다고 했다. 정현이 얼른 희철의 입을 막으려는 것처럼 희철이 내민 잔에 술을 따랐다. 병을 제대로 조준하지 못해 술이 잔 밖으로 찔끔찔끔 흘러 희철의 손등을 적셨다.

희철은 술자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마시던 맥주를 비교적 고급에 속하는 52도짜리 백주로 바꾸었다. 저녁식사 겸 안주로 카페 옆 본점격인 식당에 불고기를 주문했다. 희철로서는 여간해서 안 하던 짓이었다. 북한사람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는 희철이 비용을 도맡아 부담해야 했다. 박신민, 그자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더 이어가지 않았다. 강수가 합석한 원인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신 지원물품 인계인수 현장에서의 불만을 꺼냈다. 물론 심하게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나도 한칼이 있다는 인식이 들 정도로 은근히 압박했을 뿐이다. 정현도 그자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 부탁을 무시함으로써 희철이 애가 닳도록 하려는 전략을 유지하려는 듯했다.

희철이 잔을 입에 댔다. 백주 특유의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더는 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몸이 진저리를 쳤다.

“남쪽 선생님, 선생님은 이웃과 희망을 나누려는 게 아니라 절망을 나누려는 것 같아요. 얼굴에 살기가 그득해요. 누군가를 시퍼런 칼로 쿡 찌르려고 벼르는 분 같다니까요.”

별안간 피아니스트 은정이 끼어들었다. 은정의 말을 파악하기 위해 희철은 머릿속이 맑아지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런 중에도 은정은 희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퍽 당돌했다. 희철은 되레 은정의 눈빛이 시퍼런 칼날이 되어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건드리는 기분이 들었다. 잘못 들은 말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은정은 홀 안쪽 귀퉁이에 있는 무대에 서서 북소리 같은 혁명가곡을 연주했었다. 강수가 “시끄러!”라고 소리치자, 볼이 부어서 중지했다. 무료한 듯 피아노 곁에 한참 서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뭐가 켕겼는지 그들이 술을 마시는 테이블 곁으로 와서 희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은정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희철은 내심 즐겼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

“나한테 한 말……?”

희철은 팍 인상을 썼다. 은정이 ‘당신 말고 남쪽 사람이 여기에 누가 또 있어?’라고 말하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신의 무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희철은 들고 있던 잔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정현 또한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은정을 질책할 마음조차 없는가 보았다. 취기 탓은 아니었다. 희철은 은정을 처음 기억에 담아 두게 되던 날의 광경을 떠올렸다.

카페와 식당 다 맡고 있으면서 주로 식당에 머무르는 지배인 아줌마와 은정이 빈 테이블에 앉아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얼핏 보았을 뿐인데, 은정의 얼굴이 자꾸 눈길을 빼앗아갔다. 처음 만났더라도, 무슨 말을 하더라도, 좀 무람없이 굴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다감한 인상이었다.

“언제쯤이면 손님이 떼로 쏟아져 들어오갔나?”

지배인이 은정에게 묻고 있었다. 그네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스탠드 안쪽 개수대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까지 또렷이 들렸다. 홀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입구 쪽에 놓인 계산대만 없다면 종업원들의 휴게실로 착각할 정도였다. 삼지연은 생긴 지 한 달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복날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는 연변 개라는 말처럼 여름이 지나면서 갑자기 개업 축하화환들을 줄지어 세워 놓은 북한 식당들이 시타거리 일대에 보이기 시작하던 와중이었다. 5백 미터 남짓 되는 거리와 그것에 연결된 골목에 자리 잡은 북한 식당들이 어느새 열 개가 넘었다. 중국으로 인해 북한에 대한 유엔 재제의 전열이 흐트러지는 현상이라고 희철이 지원물품을 구매하는 거래처의 총경리(總經理, 사장)는 가만히 귀띔했다. 이내 일대의 북한 식당들에 손님이 귀해졌다. 손님을 꾀느라 카페 출입문 앞에 선 접대원들은 종일 헤픈 웃음을 날렸다.

“손님보다 사람 도둑이 먼저 올 것 같아요.”

얼핏 들으면 농담으로 여겨질 말을 하면서도 은정은 퍽 진지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아무리 욕을 먹어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다짐했을 법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사람 도둑이라니?”

지배인의 입가에 비웃음이 엷게 번졌다.

“평양에서 올 거라요.”

“평양?”

“…….”

“우리 접대원 동무들을 다른 회사서 빼간다, 기 말이야? 아니면 평양으로 소환당할 간나가 생긴다는 말이야?”

지배인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은정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한다기보다는 한 말을 증명할 무언가를 내밀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듯했다.

“내가 기렇게 무능하게 보여?”

지배인이 은정의 팔을 꼬집었다. 입까지 앙다물었다. 은정은 꼬집힌 데를 붙잡고 피아노 곁으로 달아났다. 얼굴에 억울함이 짙게 비꼈다. 그런 대접으로 마음 아팠던 적이 꽤 많았을 것 같았다.

“연기를 따라가면 굴뚝이 나온다더니. 소문이 맞네, 맞아. 너는 길을 잘못 찾아든 들짐승 같구나. 다른 회사서 너나 데려갔으면 좋갔어.”

지배인이 은정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저 도깨비가 기래도 음악대학을 필업(졸업)한 재원인데……. 아깝디, 아까워.”

희철과 함께 앉아 그 광경을 슬쩍슬쩍 눈에 담던 정현 또한 혀를 찼다. 자기 정수리를 가리킨 집게손가락을 빙빙 돌리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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