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 - ⑲

어서와! 서울 이곳은 처음이지?_3

강세훈 기자 승인 2020.10.13 17:04 의견 0

 이번에는 한강길 9코스 세번째 입니다.

  마포를 지나는 구간은 이야기거리가 많습니다. 그만큼 왕래가 잦은 곳이자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한강은 매우 넓은 폭을 가진 밋밋한 강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이전에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고 백사장이 널부러져 있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이 반짝이는 모래와 주변 낮은 산봉우리가 어우러진 그러한 한강이였습니다. 명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찾아왔을 때 한강유람을 보지못하였다면 제대로된 대접을 받지 못한것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강 유람은 중요한 행사장소였습니다. 특히 아름답고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던 정선도 한강에서 만큼은 여러 그림을 남겼습니다. 특히 한강 하구인 마포-서강-양화진-양천관아가 있던 곳이였습니다. 지금은 양화진의 아름다움은 그림으로만 마주할 수 있으며, 남아있는 지명은 상상을 불러일으켜줄 키워드가 됩니다. 한강길 9코스의 마무리는 양화진 일대를 걸어가는 코스입니다.

 

평등한 세상을 외치다, 절두산 천주교 순교 성지

  당인리 발전소를 지나 카페거리를 따라 내려오면 머리위로 분주하게 달리는 철교밑에 다다릅니다. 오른편에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및 양화진 관아터가 있고, 오른쪽에는 천주교기념관과 성당이 있습니다. 이곳을 절두산 순교지라고 부릅니다. 원래 이름은 누에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형상이라고하여 ‘잠두봉’이라 불리웠으나 천주교 박해때 처형하던 장소로 쓰이면서 ‘절두산(切頭山)‘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잠두봉은 양화진이라는 강북의 나루가 있었던 장소이자 서쪽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였습니다. 전망대처럼 높은 봉우리가 있기도 하거니와 밋밋하지 않고 도드라진 풍경을 보여주는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아름다움 속에 비극이 머문 곳이기도 합니다.

절두산 유적지의 모습


1866년 고종 3년인 시기에 제1차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면서 양화나루와 잠두봉의 역사는 변하게 됩니다. 이 해 로즈(Roze)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조선 원정을 시도한 끝에 8월 18일에 양화진을 거쳐 서강(西江)까지 올라왔습니다. 함대는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1866년 9월에 다시 강화를 침략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당시 강화도 정족산성과 문수산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프랑스군을 퇴출시킵니다. 이후 조선은 이 일련의 사건이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였고 프랑스 함대가 정박한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합니다. 이는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묻고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한 의도였는데 이때부터 잠두봉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칼날을 받은 곳이라는 뜻에서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의미가 다른 두 개의 이름이 생기게된 연유입니다. 천주교회에서는 1966년 병인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 일대를 매입한 뒤 잠두봉을 중심으로 성당과 순교기념관을 건립하고 사적지로 조성하였으며, 1976년 이래로 한국 성인들의 유해를 옮겨와 안치하였고 현재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지가 되었습니다. 지난2019년 11월에 천주교서울순례길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로마 교황청에서 공식 인정한 동양 최초의 순례길이며 절두산순교지도 순례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천주교는 다른 나라에 비해 신자수가 제법 많습니다. 아마도 천주교를 접한 방식이 달랐기 때문일겁니다. 천주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시나요? 천주교는 1600년대 천주학 또는 서학이라는 서양의 학문으로 조선에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서양의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던 학자와 양반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진 천주교는 점차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당파 싸움으로 사회가 혼란스럽고 전염병과 재해가 끊이지 않아 백성들이 살기가 힘들었는데,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천주학은 양반과 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인간은 양반과 천민으로 나뉠 수 없으며 남녀가 평등하다는 천주학의 기본 가르침은 지배 계층의 횡포와 거듭되는 재난의 고통에 시달리던 일반 백성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학문으로 시작한 천주교는 자체적으로 미사도 보고 세례도 거행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 스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국까지 가서 직접 신부를 만나거나, 바티칸에 공식적으로 사제를 보내달라고 건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천주교가 서서히 사람들에게 종교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천주교인 중에는 정약용, 이승훈, 이가환 등의 실학자와 양반 부녀자들이 많았으며 1845년에는 김대건이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되었고 안성 미리내성지에 김대건신부의 묘지가 있습니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았던 것은 유교의 교리와 매우 달랐기 때문인데, 유교는 충효가 중요시되고 위아래의 순서를 우선시했다면 천주교는 남녀노소 평등하다는 교리였기에 서로 상극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지배계층에서는 평등 논리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하였을 것이고, 평민들은 평등하다는 말에 변화와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 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를 가하게 되었고, 같은 평등사상이라고 서학(천주교) 대신 자체적인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이 발생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동학은 이후 천도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기본사상은 ‘사람이 곧 한울’ 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이기도 합니다. 병인박해 이후 20년이 지난 1886년에 조선과 프랑스가 맺은 조약으로 천주교는 비로소 종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양화대교 변천사, 제2한강교에서 양화대교로

 현재 양화대교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양화나루는 강북 잠두봉과 강아래 선유봉 아래를 연결하여 운행하였으며 양쪽의 나루에 같은 양화나루(양화진)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지금은 양화대교가 양쪽으로 연결되어 나루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위치의 중요성 때문에 일찌감치 대교가 건설되어 운영되었는데 1965년 1월에 제2한강교로 개통되었고 1981년 11월에 기존다리의 안전확보 및 교통량 확대를 위해 새로운 다리를 추가 건설하여 나란히 붙여진 다리가 되었는데 확장된 후에 1984년 11월 부터는 양화대교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이후 성능개선을 통해 각각 다리가 일방으로 통행하게 변모하였는데 양평동 방향이 구교(1965년 개통)이며 합정동방향이 신교로 보면 됩니다. 선유봉이 있었던 자리는 올림픽대교가 건설되면서 발파작업을 통해 채석하여 한강변과 여의도 제방사업에 투입되면서 사라졌고, 그 아래에 모래사장은 물길로 변하여 지금에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양화대교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또 한번의 변신을 합니다. 경인아라뱃길과 연계한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양화대교의 일부 구간을 대형 선박이 쉽게 통과할 수 있도록 교량 중앙의 112m 구간과 이를 지지하던 교각 2개를 해체한 후 로제아치교를 대신 설치하는 구조개선공사가 2010년부터 2011년 말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지금에 양화대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큰 배는 다녀본적 없는 한강입니다.

 

현재 양화대교 북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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