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 작가의 장편소설] 기억 ⑦

이정 작가 승인 2020.10.14 12:47 | 최종 수정 2020.10.14 14:05 의견 0

제 2장

누드모델

1

 

청나라 때 세운 돔형 불탑인 서탑 꼭대기에 유난히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늘 누런 스모그나 황사에 잠긴 이 도시의 여느 때 하늘이 아니었다. 잉어며 용, 독수리 모양을 한 연(鳶)들이 긴 꼬리를 흔들며 유유히 헤엄쳤다. 가까운 고가도로 옆 공터에서 아이들이 연줄을 잡고 연을 얼렀다. 탑 모서리에 달린 풍경을 울리며 다가오는 바람이 싱그러웠다. 적당히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계절풍의 자취가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눈 속에 도깨비 얼굴이 그득하군.”

정현이 연을 바라보느라 해찰하는 희철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기러게 말이야. 날래 보러 가자우.”

강수가 입에 발린 맞장구를 쳤다.

희철은 오늘도 정현, 강수와 함께 역에서 지원물품 인계인수를 마치고 요즘 단골이 된 삼지연으로 가는 길이었다. 정현과 강수가 손님을 데려오라는 지배인의 부탁을 받은 모양이었다. 카페나 식당에서 나갈 때 종종 강수가 지배인에게서 밑반찬 따위가 든 비닐 백을 받아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자기들이 계산을 해야 할 때에는 카페든 식당이든 이따금씩 술값, 밥값도 내지 않았다. 손님을 데려오는 대가임 직했다. 희철은 희철대로 손님이 없는 식당이라서 대접이 후하고 깍듯이 반기는 것을 높이 샀다.

하지만 오늘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삼지연으로 갈 줄 뻔히 알면서 우정 거기로 가자는 말을 희철이 먼저 꺼냈다. 스스로의 다짐을 돌이키지 못하도록 선수를 쳤다. 그날 마신 술값을 내러 가야 한다고 둘러대면서. 그런데 정현은 은정에게 연정을 품은 사람을 대하듯 희철을 골렸다.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이라나. 미녀를 두고 남자들끼리 하는 시건방진 농담? 말투로 보면 자신들은 은정과의 사이에서 아무 일이 없었다는 태도였다. 물론 강수는 어제 삼지연에 가서 은정에게 사과했다고 했다. 희철이 민박집에서 숙취와 과거의 기억 속에 빠져 힘들어 하던 시간이었다. 그날 밤 사건의 책임을 희철 자신이 다 뒤집어쓴 것처럼 그들의 느긋한 태도가 더욱 뒷골을 당기게 했다.

“최고영도자 동지한테 잘 말씀 드려서 노총각 결혼 좀 시켜 줘.”

희철은 정현의 농담을 한술을 더 떠서 받았다.

“아주 통 크게 나오는군. 평양에 들어와서 살갔다고 결심하면 안 될 게 없디.”

강수가 끼어들어 빈정거렸다.

“푸순(抚顺)으로 파견 나온 수예가집단이 있었더랬디.”

정현이 마침 생각나는 것이 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수예가 에미나이 하나가 자기네 사무실에 래왕이 잦은 남쪽 사업가에게 홀딱 반했더란 말이야.”

“에이, 겁도 없이 감히 누가…….”

희철은 그들의 감시체계를 떠올렸다.

“남쪽 사람들이 겉은 반지르르 하거든. 레이디 퍼스트 어쩌고 알랑대면서 여성들을 위해 주는 척하니까니 우리 에미나이가 깜빡 간 거디 머. 먼저 들어가라고 문 척 열어 주디, 귀 홀리는 고운 말 써 주디……. 평양 사내들하고는 맛이 영 다를 것이거든.”

“그건 맞아. 북쪽 남자들은 여자를 너무 괄시해. 서울에서 그랬다면 여자들이 쏘아대는 눈총으로 온 몸에 구멍이 숭숭 뚫렸을 거야.”

정현과 강수가 동시에 희철에게 눈을 흘겼다. 자기네 쪽에 흠집이 된다 싶으면 두 사람은 늘 서로 짠 것처럼 같은 반응을 보였다. 틈만 보이면 침략해 들어오는 괴뢰군 같다고 언젠가 정현은 투덜댄 적이 있었다.

“수예가가 남쪽 남자에게 편지를 썼어. 남자의 마음은 들물과 같아서 여러 갈래로 흐른다지만, 여자의 마음은 폭포수와 같아서 오직 한 군데로만 흐른답니다. 선생님을 사모하는 제 마음 폭포수와 같답니다.”

정현이 편지 내용을 기억해 뒀는지 시를 낭송하듯 읊조렸다. 그리고는 기가 막혀 흐으, 한숨을 토해냈다.

“편지를 사업가 놈에게 전하려고 가지고 있다가 동료에게 덜커덕 걸렸디.”

“…….”

“기런 거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해.”

“어떻게 되었는데?”

“인차 조국에 소환되었디. 농촌으로 영구 추방될 수도 있다고. 기리 되면 평생 논밭갈이나 하면서 살아야 되디 머. 나라가 기른 아까운 인재가 자본주의 냄새를 맡고 뻑 갔으니, 원. 기 냄새가 향긋한 것 같디만, 사람 죽이는 독가스라는 걸 이 에미나이가 몰랐단 말이야.”

“자본주의 독가스보다 더 나쁜 게 뭔지 알아? 그런 일로 강제추방을 보내는 그쪽 제도야.”

희철은 맘에 쏙 드는 여자를 만난 총각처럼 정현에게 가급적 내숭을 떨려고 마음을 다잡았었다. 그런데도 입 밖으로 튀어나가는 말을 누르지 못했다. 농촌 추방이면 다행일지 몰랐다. 남한사람을 접촉하거나 남한사회를 많이 아는 이는 재판도 없이 관리소라고 부르는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진다는 탈북민들의 증언이나 언론 보도가 어느새 사람들의 일상에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 북한은 온통 수용소뿐인가 하는 착각이 잠시 일었다가 사리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희철의 반응이 못마땅한지 정현과 강수가 또 희철에게 눈을 흘겼다. 희철은 그러한 태도에 어느 새 익숙해졌다. 그것이 바로 그들과 친분이 조금씩 쌓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그들이 희철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자기네 체제를 함께 욕할 수 없어 습관적으로 반감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편한 대로 생각했었다. 그들은 중국 생활을 적잖이 했다. 희철의 전임자 말로는 5년째다. 남한에 대해서, 외부세계에 대해서 들고 본 것들이 꽤 많을 것이다. 내심 자기네 체제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꼈음 직했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자고 했으면서도 가기 싫은 곳을 가듯 희철은 데면데면 삼지연을 항해 걸음을 옮겼다.

카페 출입구에서 입간판처럼 선 접대원 둘이 그들을 보자 입을 삐쭉였다. 은정도 밉지만, 당신들은 더 밉다는 힐난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출입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정석이 되다시피 한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랜드피아노 옆 기둥에 등을 기대고 홀로 서 있던 은정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유리 파편에 찔린 정강이 부근의 스타킹 위로 도톰하게 부푼 밴드 자국이 보였다. 겉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제 일은 정말 잘못 되었어요. 어떻게 사과해야 은정 씨 마음이 풀릴지…….”

희철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래를 잡아도 시원치 않을 분이 고작 새우에게 분풀이를 해서야 되갔어요?”

은정의 응대는 까칠했다. 희철은 서류가방에서 세계명곡선집을 꺼내 건넸다. 아침에 칭녠거리의 신화서점에 가서 산 것이다. 마침 서울에서 발행된 한글본이 눈에 띄었다. 곡명이 익은 명곡들이 많았다. 악보집을 펼쳐 목차를 일별하던 은정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강수는 무슨 책인가 하여 책 쪽으로 목을 늘였다. 깊게 고민하지 않고 덜렁 남쪽 책을 산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자본주의 냄새를 맡고 뻑 갔다는 수예가에 대해 방금 들은 탓일까?

“참사 동지가 발을 함부로 놀린 게 문제지요. 참사 동지는 머릿속에 시커먼 안개란 놈이 도사려서 앞을 통 내다보지 못한단 말입니다.”

악보집을 옆구리에 낀 은정이 이번에는 강수를 향해 한 마디를 더했다. 강수는 충분히 사과했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판단에 지나지 않았다. 강수가 뭐라 따지려고 고개를 곧추세웠지만, 정현이 보일락 말락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안개? 어디서 듣던 말인데?”

정현이 건방진 은정의 태도를 그 정도로 감내하면서 어물쩍 우스갯말이나 나누자는 의도를 드러냈다. 정현과 강수는 술자리에서 건배사를 한답시고 가끔 ‘진달래’(진짜 달라면 줄래)니 ‘택시(택도 없다, 씨팔놈아)’니 하는 따위의 비속어들을 재미 삼아 쓰곤 했다. 어느 땐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같은 비속어들을 되풀이 지껄이며 낄낄댔다. 제 딴엔 ‘내가 남조선을 좀 알지’라는 과시였다. ‘남조선은 너무 퇴폐했어’라는 조소이기도 했다. 은정도 벌써 그들에게 물 들었을까?

“안개? 안 돼, 개새끼야? 아니면, 안 주면 내가 개? 기런 뜻은 아니갔디?”

정현이 미심쩍은 눈빛을 건넸다.

“당근!”

“기럼?”

“개가 아니다. 기러니까니 개보다 못하다.”

은정이 스스로 지어낸 말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자신들이 물 들었으니까 은정도 물 들었을 것이라고 정현이 예단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얘가 뚜껑이 팍 열렸네.”

강수가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자기 뚜껑이 먼저 열리는가 보았다. 정현이 다시 손을 슬쩍 들어 강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주둥이를 더 놀려 보라. 재미난 일이 생기갔다.”

강수가 마지못해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쳇!”

은정이 서둘러 주문을 받고 휙 돌아섰다.

“기만해요. 홍두깨로 얻어맞고서 겨우 부지깽이를 들이댔는대요 머.”

정연이 은정을 역성 들었다. 불미스런 일이 또 생길까 가슴을 졸이던 희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건방진 간나…….”

강수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봉투를 테이블에 내려쳤다.

그 사이 출입문 앞에 서 있던 접대원이 들어와 생맥주가 담긴 피처를 내왔다. 세 사람은 처진 분위기를 떨쳐 내기 위해 서로의 잔을 채웠다. 한 모금 들이키는데, 은정이 피아노를 연주했다. 귀에 익숙한 곡이었다. 곡조를 따라가노라니 ‘노래의 날개 위에’라는 노랫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악보대 위에 노란 표지의 새 책이 놓였다. 희철이 방금 건네준 악보집이었다.

“참사 동지, 식당에 가셔서 지배인을 만나고 오시면 안 되갔나요? 힘들갔으면 제가 가랍니까?”

정현이 강수에게 부탁을 하는 척 지시했다. 강수가 마른 명태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일어났다.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몸이 무거워 보였다.

“요즘 염장(鹽藏) 송이가 나왔을 거야요.”

정현이 강수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아마도 반찬을 챙기려는가 보았다.

“공화국에서는 아내와 섹스 할 때에도 침실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하나?”

두 사람만의 시간이 되자 희철이 농담을 건넸다.

“참사 동지에게 희철 선생이 한 말을 전했느냐는 말을 기리 빙 돌린 거야? 하다 만 이야기를 가지고 전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기래서 나머지 이야기를 마저 하자고 참사 동지를 위층에 가시라 했디 머.”

“잘 했어. 앞으로도 입에 지퍼를 꽉 채우고 있으라구.”

“찾으면 중대한 사실을 발견할 것이라고 했디? 중대한 사실이 대체 뭐야?”

정현이 다시 더듬이를 내밀었다.

“우리 같으면 즉각 찾아 주겠어. 탈북민이나 이산가족 중에 찾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대 봐. 물론 당사자가 허락하는 조건에서.”

희철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중대한 사실을 발견할 것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했다.

“주체를 지키려면 울타리가 튼튼해야 되는 거디 머.”

정현이 정색하는 척했다.

“주체가 뭔데? 그건 철조망을 쳐서 스스로를 고립시켜서 얻는 게 아니야. 국민이 자유로워야 진짜 주체지.”

“자자, 엉뚱한 말 말고. 중대한 사실이 뭐야? 우리가 판단해보고 찾아 주든지 말든지 할게.”

정현이 자칫 설전으로 번질 기세를 눌렀다. 각각 따로 정해진 결론으로 이끌기 위한 끝없는 소모전을 작정하지 않는 한 입에 올리기에 껄끄러운 이야기를 피하는 버릇에 그들은 서로 길들여져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 참음으로써 유지되고 있었다.

“찾으면 자연히 알게 된다고 이미 말했어.”

“기러면 좋아. 내가 조건을 하나 붙일 테니까니 들어주갔어? 서로 돕고 서로 좋자는 말이디.”

희철은 정현의 얼굴에 눈길을 꽂고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이미 말한 기 건 알디? 기걸 들어줘. 당장 나도 행동을 개시할게.”

희철과 정현은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씩 마셨다. 정현이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것은 자신이 어렵잖게 그자를 찾을 수 있다는 거듭된 과시임이 분명했다.

 

정현이 그 건의 이야기를 처음 꺼낸 것은 희철과 첫인사를 나눈 다음날이었다. 중국에서 구입하는 지원물품에 한해서 실제보다 1, 20%쯤 적게 평양에 보내고, 그 물량에 해당하는 현금을 남쪽과 북쪽이 3 대 7로 나눠 사사로이 쓰자고 했다.

“당일꾼들도 살아 있으려면 먹어야 하거든. 인수증은 계획량대로 발급해 주갔어.”

희철은 전임자로부터 업무 인계를 받으면서 그들이 돈이 필요한 사정을 이미 귀띔 받았다. 나라로부터 현지 체류 비용조차 한 푼 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 처지에서도 평양의 가족들을 보살피고, 윗사람들에게 상납을 해야 한다. 외국 파견 근무라는 이점을 사서 그들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다. 윗사람의 관심이 느슨해지면 뇌물을 바쳐 윗사람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해야 한다. 그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과외의 돈벌이로 평양의 회사들이나 신흥 부자들이 부탁하는 물건을 중국에서 구매해 보내 주는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얼마간의 수고비를 뜯는 것이 수입의 전부라고 했다. 희철은 지난 2개월 동안 그들의 행동을 곁눈질하면서 전임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전임자는 희망나눔 대표의 내밀한 승낙 아래 가끔씩 지원물품의 현금 배분에 응했다고 했다. 정현의 제의를 전하는 희철에게 전임자는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까 말한다면서 그런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사람들 자존심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3 대 7 배분 원칙만을 정해 둔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야.”

희철의 보고를 받은 대표는 그 일을 적당히 벌여도 좋다는 뜻을 내비쳤다.

“희철 씨 활동비가 부족할 테니 정현 지도원과 나눈 우리 몫에서 활동비조로 조금씩 받는 건 희철 씨가 알아서 하고, 그 나머지는 다 그 사람을 줘. 그 사람이 부하나 동료들의 생활비까지 챙겨 주는 갸륵한 짓을 한대.”

대표는 전임자가 희철에게 자세히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알고 있었다. 전임자는 배분 몫을 정현에게 돌려주는 것까지 희철이 답습할까 우려해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 듯했다. 희철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활동가들 또한 궁핍한 여건에서 활동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까. 그런 한편 정현이 갸륵하다는 진단에 대해서는 대표의 천성이 그려낸 아름다운 그림이 아닐까 희철은 짐작했다.

희철로서는 마다할 입장은 아니었다. 자칫 운이 나쁘면 배임죄나 횡령죄로 교도관을 섬기며 사는 세월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대표의 사실상 승인 아래 하는 일이어서 불미한 상상은 접기로 했다. 다만 정현에게는 지난 관행을 모르는 척하며 큰일 날 소리라고 일단 손사래를 쳐 두었다. 차차 그자를 두고 벌어질 일들을 추스르려면 카드가 필요했다. 뇌물을 주면 받은 사람은 주는 사람의 뜻에 따라 무조건 움직인다는 것이 뉴턴의 운동 제4 법칙이라던가?

 

“희철 선생에게만 우리 울타리의 빗장을 슬쩍 풀어 주려고 했더니 안 되갔다.”

희철이 대꾸가 없자, 정현이 배짱을 튕겼다. 하지만 희철의 머릿속에서는 밝은 빛이 어른거렸다. 합당한 대가를 받으며 그 건을 거래할 시점이 곧 다가오리라.

“안 되긴?”

“찾아 준대도 생기는 게 없잖아?”

“일단 찾아보라니까. 현금 배분 문제는 찾은 뒤에 이야기하자구.”

“남조선 사람들은 말만 번지르르하디 머. 설마 그 사람이 북파간첩이라는 말은 아닐 테고.”

그자가 차라리 간첩으로 몰리는 사달이 벌어졌으면…….

그때 큰 목소리가 출입구 쪽에서 우렁우렁 들려왔다. 식당에 갔던 강수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비닐 백을 들었다. 희철과 정현은 대화를 멈추고 귀를 세웠다.

“뭐야? 뭐라고? …… 동무, 기걸 말이라고 해?”

차츰 강수의 목소리가 홀 안을 압도했다. 은정이 연주를 멈추고 인상을 썼다. 통화를 마친 강수가 그들이 앉은 테이블 앞에 섰다.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잔뜩 비꼈다. 하지만 눈길은 정현이 아니라 희철을 향했다.

“야단났어.”

강수의 눈길이 애원으로 바뀌었다.

“평양에 보낸 영아원용 분유 말이야. 기걸 실은 트럭이 안주 부근을 지나다가 전복됐대. 트럭 밖으로 쏟아진 분유통들을 시골놈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다 주워 갔다는 거야.”

상부에서 제 날짜에 지원물품을 보장하라고 한다고 해서 며칠 전 급히 트럭을 이용해 보낸 것이었다. 사흘 뒤에 있는 화물열차편으로 보내면 늦는다고 강수가 설레발을 쳤었다.

“우리 쪽 여론이 공정, 투명 분배를 부르짖기 시작한 지 오래된 것 알죠? 안 된 말이지만, 모처럼 분배 한번 제대로 된 것 같은데요. 흐흐흐.”

희철은 짐짓 어깃장을 놓았다. 강수가 희철을 향해 말아 쥔 주먹을 흔들었다. 얼마 전 강수는 평양 위주의 지원물자 보급에 대해 궤변을 늘어놓았다. 사람들은 많은데 떡이 적으면 힘센 놈이 먼저 먹게 마련이라나. 미국 구호단체들은 자신들이 직접 수송에 나설 때 일부러 트럭의 적재함에 올라타서 수송노정에 지원물품을 얼마씩 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식량이 시골사람들에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희철 선생, 대책을 세워 달라우. 그놈들을 다 잡아다가 죽이든디 해야디…….”

정현에게 눈짓을 하며 강수가 돌아섰다. 수습을 위해 자기네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근심이 끊일 새가 없네. 지원물품이 줄어든다고 책망을 당하는 처지인데, 사고까지 생기니까니…….”

정현도 투덜대며 따라 일어섰다. 부하를 길잡이 세운 상관이라도 되는 양 설렁설렁 강수를 뒤따랐다.

“맥주는 마저 마시고 가야지.”

출입문을 빠져나가는 그들의 등 뒤에 대고 희철이 외쳤다. 출입문 닫히는 소리에 희철의 말이 공허하게 묻혔다.

은정은 피아노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해 예언의 근거나 따져볼까? 아냐. 제 발이 저려 발광하다가 속마음만 고스란히 들키는 꼴이 되겠지. 희철은 앞에 놓인 맥주를 마저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서류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속>

 

작가 소개

▲이정: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경향신문에서 일하다가 2010년 늦깎이로 <계간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국경>(문화관광부 문학부문 우수도서), <압록강 블루>(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소설집<그 여름의 두만강>등이 있다. 등단 이후 북한과 북한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써 왔다. 1998년 이래 북한은 일곱 차례 다녀왔다. 현재 사단법인 공정세상연구소 소장, 통일문학포럼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압록강변에 선 작가. 건너다보이는 곳은 북한의 삭주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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