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 작가의 장편소설] 기억 ⑭

이정 작가 승인 2020.11.19 17:48 | 최종 수정 2020.11.23 18:03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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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싸늘해졌다. 따스한 햇볕이 창 안으로 들어오면 반갑다. 계절이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열차 같구나.

희철아, 서울의 가족들이 내게 무수히 했을 질문들이 떠오른다. 당신은 진정 고통스럽기만 했다던 남조선에서의 생활을 거기선 마감했소? 과연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소? 나도 내게 수없이 던졌던 질문들이다.

처음 평양에 도착한 뒤, 공화국의 발전상을 소개하는 여러 시설들을 돌아보았다.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인민대학습당, 어린이들의 예능특기를 발굴, 육성한다는 소년궁전, 산모와 아기에게 행복의 요람이라는 평양산원, 체육강국을 선도한다는 청춘거리의 각종 운동시설, 기차역까지 완비한 드넓은 예술영화촬영소, 인민들의 즐거운 휴일을 보장한다는 대성산 유원지……. 남조선에도 이런 정도의 시설들은 있었다. 선수촌은 태능에도 있었고, 대형 종합병원들은 서울이나 지방 대도시에 즐비했다. 유원지는 전국에 적잖이 널려 있으니 대성산 유원지가 더 낫다고 하기 힘들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련해 주셨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인민에 대한 한량없는 배려가 한껏 슴배였지요.”

안내원은 지상낙원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자부심에 찬 얼굴로 설명하곤 했다. ‘그런 것 말고 더 좋은 것을 알려 줘.’라고 간청하거나 ‘당신이 서울을 알기나 해?’라고 반박하려는 마음이 그때마다 불쑥불쑥 일었다. 사사건건 북조선을 헐뜯는 남조선의 교육 탓이었을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서로 증오하도록 강제된 사람들이었다. 아니, 무엇이 되었든 일단 부정하고 보는 태도에 익숙해진 내 못된 습성 탓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점을 반성하며 그 훌륭하다는 시설들보다 안내원의 말대로 그 시설들을 꾸려 준 수령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남조선의 독재자와 비교하려 애쓰기도 했다. 사실 내가 바라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평등, 공평, 정의, 자유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닐지라도 따뜻한 것, 인간적인 것, 거창한 것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는 위로 같은 것.

“그런데 말이에요. 이 좋은 시설들을 만들어야겠다는 발상을 왜 다른 사람은 하지 못한 거죠? 인민에게 유익한 일은 왜 모조리 수령님만이 해내시는 거죠?”

그때 나는 이런 질문이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인 줄 몰랐다. 안내원은 ‘몰라도 한참 모르네’라는 태도로 나를 훑어보았다.

“전국의 모든 인민이 이런 시설들을 마음대로 향유할 수 있나요?”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나는 속절없이 보탰다. 제발 의심이 부정되는 경이로운 답변이 안내원의 입에서 나오기를 기대했다. 아니면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곧 할 수 있도록 애를 태우고 있다고, 그것도 아니면 그저 진솔하다고 느낄 만한 답변이라도 돌아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안내원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라고 명령하듯 이번엔 얼굴을 잔뜩 붉혔다.

내 외할아버지는 입북에 관한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딱 한 번 만났다. 외가에서 외가 식구들과 함께 한 단란한 자리가 아니었다. 보위원이 입회한 호텔의 면담실에서였다.

당시 80이 넘은 외할아버지는 공직에서 물러나 이젠 연로보장을 받으며 산다고 보위원은 귀띔했다. 이빨이 빠져서 볼이 쪼글쪼글했고, 눈이 쑥 꺼졌더라. 양복을 갖춰 입었지만, 몸피가 준 탓인지 남의 옷처럼 헐렁했다. 그래도 눈빛만은 형형했다. 한때 고관을 지낸 위세가, 뭔가를 고집스럽게 추구해 온 흔적이 엿보였다. 만나자마자 나는 그런 외모의 어느 부분에서 금방 어머니를 발견했다. 구태여 그 관계를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겠더구나.

“네 어머니가 리순옥이 맞단 말이지?”

기대와 달리 외할아버지는 내게 자꾸 당신과의 관계를 확인하려 했다. 부들부들 떨면서. 다른 데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일 지경이었다. 그분 역시 내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읽었을 것이다. 감격에 겨워서, 아니면 연세가 많아서 그 순간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나름으로 짐작했다.

“남쪽으로 피란 가시던 중에 박천에서 헤어지셨다지요.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대요.”

그러나 외할아버지의 같은 질문은 한동안 더 되풀이되었다.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읽힐 지경이었다. 끝내 나는 어머니의 안부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이 어색한 상봉의 원인이 무엇일까? 뒤에 깊이 생각했다. 처음에는 이 양반이 늙어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할까 의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기력은 멀쩡했다. 아, 어머니를 버리고 온 불효막심한 자식이라는 질책이 숨어 있겠구나.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외손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순간부터 곤욕스런 처지에 빠졌을까? 그 마지막 의심은 차차 합리성을 확보했다. 전쟁 때 피란 중 외할아버지가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어머니가 알았던 것처럼 외할아버지 또한 딸이 그 폭격으로 사망한 줄로만 알았었다. 그런데 조국을 배반한 반공포로 출신과 함께 남조선에서 살고 있다니. 외할아버지 가족이 전쟁 중 남쪽으로 도망치던 과정까지 드러났다. 그로써 외할아버지의 권위, 이곳 사람들의 말로 정치생명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지 않았을까? 외삼촌들과 이모, 그 자식들의 출셋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았을까?

의심이 맞는다면 외할아버지를 찾아 이북으로 온 내 생각이 짧았다. 이북에 외할아버지라는 전직 고관이 있다는 것과 이남에 반공포로와 함께 사는 딸이 있다는 것은 서로의 반대편에서 보면 같은 무게의 반동감이었다. 외할아버지 가족들이 나를 찾지 않는 섭섭함이 이내 죄책감으로 둔갑했다. 어느 날 신문에서 외할아버지의 부음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찾아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가족들은 이미 아버지가 반공포로로 남쪽에 남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인해 충분히 수난을 겪은 분들이었다. 아버지의 동생과 사촌들을 몇 번 만났다. 그러나 가슴에 대못으로 박힌 그분들의 수난이 죄스러워 더는 만나기가 저어되었다. 서로 어려운 살림이어서 찾을 필요 또한 없었다.

내가 평양에 온 뒤 얼마 안 됐을 때 본 광경 하나를 더 말해야겠구나. 그날 나를 태운 승합차는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대동강을 건너 평양시내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대성산의 혁명열사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 인도에 시민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오전에 도심을 통과할 때에도 시민들이 모두 쏟아져 나온 것처럼 인도를 따라 인파가 줄기차게 이어졌었다. 해방산여관이 보이던 곳에서부터 김일성광장, 천리마동산, 개선문에 이르기까지. 아직 그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햇볕이 드는 보도 위에 철퍼덕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무릎을 두 팔로 그러안고 조는 사람, 지겨워 죽겠다는 듯 하품을 하며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도 적잖았다. 교차로에서는 학생들의 브라스밴드가 여전히 풍짝풍짜악 행진곡을 연습하고 있었다. 오래 틀어 늘어진 녹음테이프가 돌아가는 것처럼 맥이 빠진 소리였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세 시였다. 궁금증을 못 이긴 나는 어느 나라 대통령이라도 오느냐고 나를 데리고 다니는, 안내원이라고 호칭하는 보위원에게 물었다. 보위원은 나중에 다 알게 될 것이라며 질문을 막았다.

그날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여기에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듯 주위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누가 TV의 볼륨을 높였다. 돌아보니 여종업원들이 벽 쪽 테이블 위에 놓인 TV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테이블을 차지한 손님들도 다 고개를 거기로 돌렸다. 무개차에 탄 남녀 두 젊은이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에 다갈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와 큰 레이스가 달린 하얀색 블라우스 깃을 청색 코트 밖으로 내놓은 여자였다.

“통일의 일꾼을 자처하고 북남 분단의 장벽을 넘어온 남녘 두 대학생! ……”

여자 아나운서가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평양시민들의 뜨거운 환영 속에서 남녘 대학생들은 …… 살뜰하고 다심한 위대한 수령님의 은덕이 너무나도 고마워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고……”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이 두 팔을 ‘V’자로 활짝 펴 흔들었다. 인도의 시민들은 빨간 꽃술을 흔들며 발광하듯 펄쩍펄쩍 뛰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구호를 외쳤다.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민족대단결사상을 받드는 성원이 될 것을 다짐하며 …… 남녘 대학생 대표는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우리 청년학생들이 힘껏 떨쳐나설 것을 열렬히 호소하고…….”

목에 화환을 건 여대생이 클로즈업되었다.

“평양 시민 여러분! 신념의 강자로 살겠습니다!”

여학생이 주먹을 쥔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환호하는 군중들이 오전부터 동원된 주민들임을 알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런 부조리한 짓들에 반대하여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었을까? 올 때는 신념에 차서 왔겠지만, 과연 이곳에서 신념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들의 모습이 내 모습과 겹쳐졌다.

희철아, 입북 당시의 나에 대한 환대는 곧 멸시로 변했다. 당국자들은 나를 남조선의 때를 벗겨내기 어려운, 공화국의 공민으로 살기에 부적합한 자로 낙인을 찍은 모양이었다. 그 다음에 나를 기다린 것은 수개월의 조사기관 생활이었다. 시내 구경도 몇 번 나가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중단되었다.

내가 처음 발을 디딘 평양은 이렇게 생뚱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어떠한 궁금증의 표출도, 색다른 행동도 반동적 사고와 연결되었다고 의심 받았다. 수령님을 흠모할 줄 모르는 놈으로 취급되었다. 자기네가 스스로 이름 붙인 사회주의 지상낙원의 신화에 흠집을 내는 모든 언어를 금기로 묶었다. 그런 금기만인 지상낙원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빨갱이의 핏줄이라는 연좌제의 꼬리표가 사라진 대신, 의거입북자라는 또 다른 연좌제의 꼬리표가 붙었다. 의거입북자. 얼핏 들으면 우대해 부르는 호칭 같지만, 아니다. 그 호칭 속에는 믿을 수 없는 남조선 놈이라는 성분분석표가 숨겨져 있다. 여기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주홍색으로 새겨진 그 꼬리표가 내 등 뒤에 매달려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유란 그것을 향유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겐 한시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더구나. 나는 강을 건너고 배를 불태운 뒤에야 그 사실을 통감했다.

묻어 둔 지난 이야기들을 꺼내다 보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결과적으로 나는 여기서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 생활을 마감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빛나는 한때가 있기 마련이라더라. 불행히도 내게는 아직 그런 기억이 없구나. 그 때가 오기는 올까?

오늘은 여기서 줄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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