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 - 26

만리동 너머 젖갈장수 걷던 길 - 3

강세훈 기자 승인 2020.12.08 15:22 의견 0

만리동고개를 내려와 염천교를 건너면 칠패시장터앞에 다다르면서 젓갈장수의 여정은 끝이납니다. 하지만 한강길 코스는 원점을 돌아가는 코스이기에 도성 안으로 들어가 청계광장 앞까지 가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지금은 서소문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남아있는 지명으로 가늠할 뿐이며, 도성 안 옛 모습도 수성전도를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 실제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기록에 남아있는 모습을 따라가며 한강길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이명래 고약을 아시나요? 약현성당

대부분의 상인들은 만리재를 넘어 약현고개를 통해 서소문과 염천교앞 시장으로 들어섰습니다. ‘약현(藥峴)‘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던 밭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며 이곳에는 명동성당보다 일찍 건축된 약현성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임금보다 높은 곳에서는 살 수 없다 하여 언덕 위와 같은 높은 자리에는 집을 짓고 살지 않았는데 외지인들은 빈자리가 언덕뿐이기도 하거니와 언덕 위에 집을 짓고 내려다보는 풍경을 선호하여 근대에 들어서 외국인들의 집은 대부분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약현성당은 1892년 최초 서양식 벽돌로 지은 건물로 명동성당보다 6년이나 앞선 시기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성당으로 1896년 한국 땅에서 최초로 사제서품식이 이곳에서 거행되기도 했으며 열혈사제라는 TV드라마의 촬영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최초 빨간벽돌을 사용하여 지어 후에 전국적으로 교회 짓는데 모범이 되었고 최초 세례자인 이승훈의 집이 약현성당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던 염천교 아래 모래사장이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순교자들의 제를 지내는 성당으로도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게다가 이명래고약을 만들어 팔았던 분도 서양의 신부로부터 약 제조 방법을 배워 전통방식의 한약과 배합하여 고약이라는 것을 개발했는데 약현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교인이기도 했습니다. 도성 안에 있던 명동성당을 문안성당이라 불렀고 도성 밖 약현성당을 문밖성당이라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소의문밖 만초천 흐르던 저잣거리, 염천교 앞

약현성당 정문으로 내려와 청파로 건너편 서소문역사공원을 거쳐갑니다. 역사공원 맞은편에는 수제화매장이 줄지어 서 있는 수제와거리이며 왼쪽을 보면 염천교가 보입니다. 수제화거리는 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곳으로 1925년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광복 후 미군들의 손상된 군화를 수거하여 수선을 통해 되파는 형태로 돈을 벌어 사업확장을 통해 염천교 수제화 거리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기성화가 많아지면서 이곳은 일반 구두보다는 댄스용 신발과 같은 맞춤화에 특화된 곳으로 변모했지만 현재도 25곳의 구두매장과 50여 곳의 공장이 염천교 수제화 거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수제화거리 오른편에는 기차가 다니는 것을 내려다볼 수 있는 염천교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예전에는 만초천이라는 하천이 있었고 건너편에는 칠패시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덩그라니 시장터 표시석만 남아 있을 뿐이며 남대문시장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염천교(鹽川橋) 아래에는 예전에 화약을 제조하는 염초청이 있었는데 이러한 시설 때문에 ’염초청다리’ 또는 ‘염초청교(焰硝廳橋)’라고 하였는데 이후 음이 변하여 ‘염천교’라고 변하였습니다. 지금은 경의선의 가좌선이 지나는 노선이자 예전의 물길은 매립되어 사라져버렸습니다. 염천교라는 다리는 경의선이 생기면서 염천교를 없애고 통행로 확보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다리였고 이름은 봉래교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현재 염천교로 오인되고 있는 이 다리의 원래 이름은 봉래교(蓬萊橋)이다. 이것은 일제가 수색역 방향으로 직통선로를 만들 때 ‘오리지날’ 염천교를 없애버리고 경성역 뒤쪽으로 연결되는 통행로를 확보하기 위해 새로 만든 과선교(跨線橋; 1919년 7월 15일 기공, 1920년 5월 24일 준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염천교라는 이름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익숙하게 남은 탓인지, 봉래교라는 존재는 부지불식간에 잊히고 그 자리는 종종 염천교가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이 다리의 교각에는 ‘염천교’라는 이름이 버젓이 달릴 정도로 일제가 만들어놓은 봉래교는 이제 완전히 염천교로 둔갑한 상태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님글 발췌- ”

수선전도(대한제국시) 만리재와 약현, 염천교일대


서울시내에서 철도건널목을 볼 수 있는 몇 군데 중 하나입니다. 1960-70년대에는 염천교일대와 옛 서소문공원터 일대에 가출 청소년이나 노숙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였던 곳이었고 버스를 타고 염천교 주변을 지나면 건너편에 텐트촌처럼 보이는 노숙자들의 숙소가 즐비했었습니다. 다시 되돌아와 서소문역사공원으로 되돌아와 길을 서둘러 갑니다. 이제 성안으로 들어서면 목적지에 도착이기 때문입니다. 서소문역사공원위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공원 아래에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서울대교구에서 제안해서 8년 만에 추진된 천주교 성지이자 공원입니다. 만초천변 모래사장이였던 공원은 서소문 밖에 자리한 저잣거리였고 죄인을 처형하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최근에 벌어진 사건이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고 100여 명을 처형하였고 이중에 44명이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천주교 최대 순교성지로 자리 잡게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계속 처형을 하려 하였으나 시장과 가까웠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목과 상인들이 불편함을 토로하면서 처형장을 당고개(현재 삼각지역 뒤쪽)로 이전하여 처형을 치렀고 신해박해 이후에는 절두산 성지로 바뀌게 됩니다. 유교 경전인 ’오경’ 중에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지금의 자리에 처형장을 두었고, 서소문과 광희문(남소문)은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운반할 수 있는 시구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최종 판결을 내린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형장으로는 아주 적격이었을 것입니다. 새남터가 김대건안드레아 사제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순교지였다면 서소문 순교성지는 교회를 위해 온 힘을 다하여 목숨까지 바친 평신도들의 순교지입니다. 공원 위에 가면 누워 있는 조각상을 보실 수 있는데 누워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이며, 순교지 기념탑은 순교지공원으로 바뀌면서 새롭게 조성한 탑입니다.



드디어 한양도성에 다다르다, 정동, 고종의길

서소문로를 따라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앞으로 들어서면 정동입니다. 여기서 정동로타리를 거쳐 고종의 길을 지나 선원전터를 거쳐 광화문광장으로 갈 것입니다. 마포에서 올라온 상인들은 소의문을 통해 태평관 옆 관정동길로 가로질러 시전이 있는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경운궁(지금에 덕수궁)이 왼편에 보였을 것입니다. 현재는 정동로타리에서 덕수궁돌담길을 따라 가는 구간입니다. 문화유산답사기 책을 보면 서울은 궁궐의 되시라는 말이 나옵니다. 서울 도성안에는 5개의 궁궐이 모여있기 때문입니다. 5개의 고궁 중 덕수궁의 위치는 애매했습니다. 월산대군의 집에서 선조가 임시로 사용하면서 임시궁궐이란 의미의 `정릉동행궁`이라고 했습니다. 광해군 때 창덕궁을 중건하면서 법궁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나라의 운을 기린다는 뜻의 `경운궁으로 불리우다가 270년 동안 비어 있게 됩니다. 이후 고종이 아관망명 이후 대한제국을 꿈꾸면서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제사를 지내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자주독립국가임을 선언하고 경운궁으로 돌아옴으로써 경운궁은 역사 위로 다시 올라오게 됩니다. 당시 즉조당과 석어당 2개의 전각만 있었는데 거처할 공간과 석조전 등을 세우면서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 이후 고종이 강제 퇴위되면서 순조가 즉위하고 계속 경운궁에 거처하는 고종을 위해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궁‘이라고 칭하게 됩니다. 서울에 남아 있는 다른 궁궐과 달리 규모가 작고 외부 건축물에 의해 잘리고, 훼손되다 보니 예전 규모의 3분의 1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덕수궁 뒤편 도로 주변에는 돈덕전, 중명전, 선원전터 등이 흩어진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모두가 덕수궁에 포함되었던 공간이었습니다.

덕수궁이 있는 정동은 예전에는 정릉동이라 불리웠는데 태조의 부인이였던 신덕왕후의 능이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지명이었고 이후 정릉이 이전된 후 정릉동에서 정동으로 명칭이 변모했습니다. 이곳은 서대문과 서소문이 가까이 있어 외국 선교사 또는 외교관들의 출입이 용이했던 곳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교를 위해 세운 건축물인 교회, 학교, 병원 등이 먼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정동로타리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1897년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 개신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와 고종이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려준 배재학당으로 쓰였던 역사박물관 건물입니다. 이처럼 정동 주변에는 골목마다 이유가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입니다. 그중에 가장 최근에 복원을 통해 선보이게 된 곳이 ’고종의 길‘ 일 것입니다. 고종이 아관망명(아관파천)하기 위해 경운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길이였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이런저런 말이 있기도 합니다. 근대 정릉동 일대 지도에서 ’King’s Road’ 지명을 통해 고종이 피신한 길이 아닐까 추측을 한 것에서 시작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피난의 길인지, 아니면 경희궁 군사훈련을 보기 위해 수시로 다녔는데 그때 이용한 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영국대사관이 협조를 하지 않아 지지부진했던 덕수궁 돌담길을 온전히 돌 수 있게 된것도 고종의길이 조성되면서 부터입니다. 우리는 정동공원에서 구세군교회 앞까지 길만 걸어갈 것입니다.

거슬러 원점으로 되돌아 오다.

선원전터 사이길로 내려가면 광화문 사거리에 다다릅니다. 그사이 동화면세점 앞에 특이한 표시석이 하나 자리잡고 있습니다. 새롭게 만든 도로표시원석입니다. 모든 도로의 시작점이자 기준점이 되는 표시원석입니다. 이렇게 한강길 108km를 모두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강의 시작인 청계천을 출발하여 마포를 거쳐 되돌아왔습니다. 한강과 주변은 이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 정도만 알고 다녀도 서울이 달리 보일 겁니다. 동네 지명을 통해 옛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었고, 한강의 옛모습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역사의 흔적을 찾기 위한 여행이기보다는 서울을 걸으면서 보다 살가운 장소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한강길이였습니다. 이제는 직접 걸으면서 한강과 서울을 다시 보게되는 기회가 되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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