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소가죽 영토’

김영린 승인 2020.12.30 19:26 의견 0

사진=픽사베이


옛날, 튀로스라는 나라가 있었다. 아득한 서쪽에 있는 나라였다. 그 나라의 임금은 벨로스였다.

벨로스에게 디도라는 딸이 있었다. 디도는 시카이오스라는 돈 많은 ‘재벌’과 결혼했다. 권력자의 딸인 공주와 부자 집안의 결혼이었다. 세상에 부족할 게 없을 듯싶은 결혼이었다.

그러나 벨로스가 세상을 떠나고 디도의 오빠 피그말리온이 임금 자리를 차지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피그말리온의 욕심 때문이었다.

피그말리온은 매제 집안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던 끝에 시카이오스를 살해하고 말았다. 디도는 오빠를 피해 몇몇과 함께 튀로스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디도는 지중해를 건너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 도착했다. 그곳 주민들을 만나 통사정을 했다. 이곳에서 살고 싶으니 땅을 조금만 나눠달라고 부탁했다. 소 한 마리의 가죽으로 둘러칠 땅이면 충분하다며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주민들은 내키지 않았지만 디도 일행에게 땅을 허락했다. 디도는 약속대로 소 한 마리 가죽으로 땅을 둘렀다. 하지만, 그 가죽이 문제였다. 소가죽을 잘게 잘라 이어 붙여서 넓게 둘러친 것이다. 주민들의 생각과 딴판이었다.

디도는 그 넓은 땅에 성을 세웠다. 성 이름을 비루사라고 했다. 비루사는 소가죽이라는 뜻이다. 이 성을 중심으로 카르타고가 건설되었다. 디도는 카르타고의 여왕이 되었다.

디도는 불과 소가죽 하나로 비루사를 이룩할 수 있었다. 소 한 마리로 그렇게 넓은 땅을 차지한 적은 아마도 없었다. ‘소가죽 영토’는 ‘무지’ 넓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16세기가 되었다. 서양의 뱃사람들이 동양의 어떤 섬에 상륙했다. 뱃사람들은 주민들에게 소 한 마리의 가죽으로 둘러칠 수 있는 땅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 땅에 집을 짓고 살겠다는 부탁이었다.

주민들은 먼 곳에서 온 뱃사람들을 동정했다. 그 정도쯤이야 하면서 선뜻 허용했다.

그랬더니, 뱃사람들은 디도처럼 소가죽을 잘게 잘라서 이어 붙이고 있었다. 가죽을 빙 둘러치니까 ‘엄청’ 넓은 땅이 되고 있었다. 주민들이 항의했지만, 뱃사람들은 분명히 소 한 마리만큼의 넓이밖에 되지 않는다며 되레 삿대질이었다.

뱃사람들은 그 땅에 성을 쌓았다. 그러더니 대포까지 설치했다. 그 대포를 주민들에게 겨눴다.

뱃사람들은 결국 섬 전체를 점령해버렸다. 그 땅을 스페인 왕자 필립 2세의 땅이라고 선언했다. 오늘날의 필리핀이었다.

소 한 마리로 이렇게 큰 것을 이룩한 적은 아마도 일찍이 없었다. 뱃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디도의 ‘유전자’가 녹아 있었다.

새해는 소띠해인 신축년(辛丑年)이다. 지나간 한 해는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를 코로나19 때문에 더욱 힘들게 보내야 했다. 새해에는 ‘소가죽 영토’처럼 ‘경제 영토’가 활짝 넓어졌으면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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