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 작가의 장편소설] 기억 ㉕

이정 작가 승인 2021.01.14 06:00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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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기름판매점.

“요즘은 내부 사정으로 차 배달을 당분간 중단했다고 하오. 또 된다고 해도 피아니스트에게는 절대 그런 일을 시킬 수 없으니 양해해 달라고 한단 말이오. 그래도 기다려 보기오. 지배인이 묘수를 내지 않겠소?”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우 총경리가 실망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콩기름판매점 직원 세 사람이 마침 모두 출타 중이었다. 우 총경리는 외부에 차를 주문하여 희철을 접대하려 했다. 한국의 시골에서 여종업원들이 차 배달을 빙자해서 손님과 엉뚱한 짓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났다. 뭘 그리 번거롭게 구느냐고 희철은 불편해 했다. 우 총경리는 색다른 접대가 고객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표하는 방법이라고 여기는가 보았다. 그런데 그가 차를 주문하려고 전화를 건 곳이 북한 식당이었다. 희철은 한 번도 북한 식당의 그런 영업활동에 대해서 듣지 못했다. 설령 들었다 해도 다른 때 같으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고 핀잔했을 것이다.

“시타지역의 북조선 식당들 대부분이 가까운 거리에 사무실을 둔 단골들에 한해서 특별히 차 배달 서비스를 하오. 남한사람 사무실은 빼고. 엉큼한 상상은 마오.”

그는 희철을 안심시키려 했다.

“삼지연도 합니까?”

“거긴 후발주자라서 더 열성적이오.”

세상에! 희철은 단단히 속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보온병이 든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가거나 들어오던 접대원들을 본 적이 있었다.

“이왕이면 배달을 은정 씨에게 하게 해 달라고 해요.”

우 총경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와 스크린골프를 친 뒤 삼지연 카페에서 어울린 적이 두어 번 있었다. 은정이 미모가 빼어나니까 희철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지레짐작하는가 보았다.

그는 삼지연 지배인을 어르기도 하고, 엄포도 놓았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게 특별우대 아니오? 내가 평양의 상급 동지들에게 지배인 동무를 억수로 칭찬하겠소.”

“시타가 다 내 세상이오. 내 청을 안 들어 주면 여기 사는 내 동무들이 몽땅 삼지연에 발을 끊도록 하겠소. 감당해보겠소?”

지배인은 하소연만 할 뿐 의사를 번복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우 총경리는 다른 식당에 주문하자고 했다. 희철은 만류했다. 은정이 아니라면 구태여 배달을 시킬 필요가 없었다.

희철은 실망을 견디며 일에 열중하는 체했다. 우 총경리와 다음 차례에 구매할 물건의 가격과 품질, 주문 가능 수량을 검토했다. 그런 일들을 마무리한 뒤에야 수지아툰의 조폭 우두머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본업보다 부업에 신경 쓰는 자로 비칠까 봐 곧장 앞세우지 못한 용건이었다. 우 총경리는 ‘그 이야긴 왜 안 꺼내나 했소’라고 말하듯 빙긋 웃었다. 희철의 속내를 뚫어 보는 듯했다. 찬찬히 조폭 우두머리 성식의 활약상을 늘어놓았다.

“나도 그 사람 신세를 간간히 졌소. 중국서 장사하려면 그런 사람이 꼭 뒤에 있어야 하오.”

우 총경리는 당장 성식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희철은 성식과 통성명을 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정말 안 올 모양이오.”

대화중에도 몇 번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가 투덜댔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데요, 뭘. 다음에나 주문해 마시죠.”

희철은 작별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 출입문에 달린 작은 방울이 땡강땡강 울렸다. 출입문의 유리창에 얼굴 하나가 비쳤다. 엇! 은정이었다. 옆에는 동료 접대원이 서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오는 은정의 볼이 추위를 타서 단풍이 잘 든 나무 이파리처럼 붉었다. 밖은 매운바람이 불었다. 희철은 환각을 일으킨 것처럼 멍하니 은정을 바라보았다. 은정 역시 놀라서 눈동자를 키웠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는지 이내 무심한 요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삼지연이 겨우 살아나게 됐군.”

우 총경리는 은정과 은정의 동료에게 응접테이블 가까이로 오게 했다.

“이렇게 시내 구경을 다 하네요.”

은정이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잔에 따르면서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어색한 분위기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테이블 위에 차려 놓은 찻잔에서 구수한 향이 피어올랐다. 투피스 유니폼 대신 입은 붉은 원피스의 벌어진 틈으로 살짝 골이 진 앙가슴이 들여다보였다.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는 풍경처럼 새삼 매혹적이었다. 그 안에 손을 찔러 넣었었다는 생각을 하니 낯이 뜨거워졌다. 희철은 슬그머니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이렇게 은정을 밖으로 불러낼 수 있다니. 은정이 유니폼만 벗은 것이 아니라 조국이 어깨에 걸쳐 준 온갖 의무들까지 다 벗고 나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커피를 마시고 계시오. 나는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소.”

우 총경리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커피는 입에 대는 둥 마는 둥했다. 일부러 자리를 비우겠다는 뜻이 여실했다.

“이 사람들에게 실크스카프나 하나씩 사 주어야겠소.”

우 총경리는 은정의 동료를 데리고 인근 베이타이원거리로 쇼핑을 나가겠다고 했다. 은정의 동료는 나중에 사서 식당으로 가지고 오라며 반대했다.

“일당백을 해야 할 전사들이 둘씩 붙어 다녀서야 어디 최고령도자 동지의 체면이 서겠소?”

우 총경리는 접대원의 등을 떠밀었다. 접대원은 승낙을 받듯 은정과 몇 차례 눈빛을 나누고는 못 이기는 척 떠밀려갔다. 가끔 이런 식으로 은밀히 자유를 누린 경험이 있는가 보았다.

커피를 따른 은정이 응접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은정이 밝아졌다.

“은정 씨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지요?”

희철이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정현 지도원 동지한테 이야기를 들었나요?”

희철이 조금밖에 못 들었다는 뜻으로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약간 벌려 보였다. 못 들은 척하자니 은정이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제가 제일 만만하게 보이는가 봐요. 남조선 물에 몸을 푹 담근 간나라고 밤마다 저를 비판무대에 올려놓고 성토 중이야요.”

“은정 씨만?”

은정이 고개를 숙이고 티스푼을 만지작거렸다. 그네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지옥에 내팽개쳐진 사람이 된 듯 보였다. 짐작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정현이 말했듯 평양으로 소환될 위기에 몰린 사람이 은정일까?

“저만 기런 건 아니라요. 제가 제일 많이 당하고 있을 뿐이지요. 제가 토대가 제일 나쁘거든요.”

토대? 출신성분이 나쁘면 같은 죄를 지어도 처벌을 더 강하게 받는다던가. 국가가 자신의 기억 속에서 조상의 죄를 꺼내 자손을 탄압하는 처사에 희철은 깊은 저항감을 가졌다. 희철의 가정이 그 덫에 걸렸다. 세월이 지나 권력의 탄압은 남한에서만큼은 법의 조항에서 사멸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거기서 나머지 한 발을 빼내지 못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통찰력보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사회적 고정관념을 악착스레 신봉했다. 가정환경과 지역, 나이, 정치적 신념 따위로 좌와 우를 가르고, 자기들의 의견이 보다 우월한 사회적 판단이라고 믿었다. 판단의 차이가 큰 이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것이 정치에까지 옮겨 붙었다. 어느 쪽이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삶의 명암이 바뀌었다. 희철 또한 분노와 복수와 좌절의 형태로 그 폭력 행사와 세습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었다.

“어떻게 나쁜데요?”

“할아버지가 남조선 출신인데다 국방군과 내통한 사람이라고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지요? 성분이 추락했을 수밖에요. 핵심군중에서 복잡군중으로.”

은정이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희철은 무슨 말인가 머릿속을 뒤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한사회는 인민을 핵심군중, 기본군중, 복잡군중으로 계층을 나눈다고 했던가. 핵심군중은 백두산줄기, 낙동강줄기라고 부른다는 항일투사나 한국전쟁 때의 공로자 자손이고, 기본군중은 노동자, 농민의 자손이라고 했다. 복잡군중은 부농, 지주, 자본가로서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세력의 자손. 북한은 복잡군중에게 책벌을 내릴 때 “우리 당은 당신의 과거사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인민들과 차별 없이 대해 주었소. 그런데 당신은 수령님과 당의 크나큰 믿음에 어떤 태도를 보였소?”라고 꾸짖으며 노골적으로 차별한다고 했다.

“그래서 은정 씨가 특히 더 몰리고 있다, 그 말이네요.”

“기러다가 말갔지요.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요. 기 동안 아무리 시달렸어도 저는 제 실력으로 전국대회에서 큰상을 받았어요. 당당히 공화국 제일의 음학대학에 들어갔고요. 이렇게 외국에도 나왔고요. 앞으로 더 노력하여 공화국에서 이름 있는 피아노 연주가가 될 거라요. 언젠가는 꼭.”

희철은 화음이 안 맞는 연주를 듣는 것처럼 답답했다. 하지만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남쪽 사람이 도와줄 수도 없지만, 도와준다 한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될 것이 뻔했다. 스스로의 일도 죽도록 힘든데, 누군가의 아픔에까지 귀를 열어 두고 있는 것이 싫었다.

“다 잘 될 거예요.”

희철은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은정이 몸을 숙여 희철의 거위털 패딩 앞자락에서 솜털을 하나 떼어냈다. 바늘구멍으로 삐져나왔는가 보았다.

“선생님 아버지는 어째서 우리 조국에 사시게 됐나요? 얼마 전 정현 지도원 동지가 우리 카페에 와서 영사관 성원들과 함께 나누는 말을 얼핏 들었어요.”

은정이 화제를 바꿨다. 자신을 위한 답이 희철에게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도 남으리라.

“아버지는 아녜요. 나를 낳았을 뿐인 사람이죠.”

희철은 구태여 정현의 말이 틀리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 은정이 말뜻을 헤아리려는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선생님도 토대가 나쁜 가정 출신이군요. 내막을 말해 줄 수 있나요?”

“나중에.”

“기러고 보면 선생님에 대한 제 예감이 맞는 것 같아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거지요?”

희철은 대화가 자신의 문제로 번지는 것이 싫었다. 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은정과의 관계가 더 이상 진전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문득 온몸에 전율로 다가왔다. 그래. 은정 씨가 내 일에 끼어드는 걸 내가 원하지 않듯 나도 은정 씨 일에 끼어들지 않을 거야. 그래야 은정 씨가 더 불행해지지 않아. 박신민이란 자가 우리 가정에 대못을 박았듯 내가 은정 씨의 삶에 대못을 박아서는 결코 안 되지. 은정을 괜히 불러냈다는 후회가 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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