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 작가의 장편소설] 기억 ㉞

이정 작가 승인 2021.02.22 05:30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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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립 복지관 강당.

환한 조명이 비치는 무대 위에 법당의 겉모습을 찍은 대형 사진을 배경으로 한 사람은 섰고, 한 사람은 의자에 앉았다. 법당 뜨락에 앉은 모양새였다. 선 사람은 스님으로, 앉은 사람은 목에 염주를 늘어뜨린 신자로 분장했다. 신자 역은 어머니였다. 몸이 불편한 점을 배려해서 의자에 앉게 한 것 같았다.

시간으로 보면 연극은 종막이었다. 희철은 서둘렀는데도 도로 체증 때문에 늦었다. 시내에서 출발할 때에는 북한산의 백운대가 어렴풋이 보였다. 도착했을 때에는 어둠에 묻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동네에서 할머니들끼리 하는 연극이라면서 안 와도 된다고 어머니가 말했지만, 이제 희철은 어머니가 속마음과 다른 표현을 하는 것을 속마음을 거슬러도 되는 명분으로 삼지 않았다. 더구나 복지관 원장 스님과 함께 극본을 쓰고 다듬으며 오랫동안 준비한 연극이었다. 제수씨 될 사람이 은행을 조퇴하고 가족대표로 참석하겠다는 것을 말렸다. 객석을 두리번거리며 가족을 찾았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미안했다. 객석은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무대 가까이에서 겨우 한 자리를 찾았다.

신자: (눈길을 먼데다 두고) …… 집 앞 가게에 가서 두부 한 모 사 오랬더니 잔돈으로 받은 동전이 무겁다고 하수구에 버리고 돌아온 천진한 아들. 그런 아들을 보니 살아갈 남은 날들이 까마득했어요. 아들의 아버지가 돌아오면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떠난 게 다 지나간 일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추슬렀어요. 제가 저를 죽일 것 같았으니까요. 그러나 그 사람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네요.

스님: (신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분함, 원통함, 억울함, 울화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세요? 그 사람을 똥 막대기 취급하는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 가장 쓸모없는 놈, 그런 썩어질 놈이 떠났으니 얼마나 좋은가, 되레 기뻐하는 거예요. 니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버렸다고 덩실덩실 춤을 추시라고요. 똥 막대기 같은 놈을 두고 장구한 세월을 허비했다니. 아이고, 이런 멍청이가 있나.

신자: 스님은 신자를 열등인간으로 취급하는 단점이 있어요. 부드러운 마음, 선량한 마음으로 화를 이기라. 부처님 말씀이니까 아시겠죠?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나쁜 사람을 나쁘다고 내치는 세상이 바로 무간지옥이에요. 스님, 제발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놔두세요.

스님: (화를 내듯) 에이, 보살님, 제 말을 죽어도 안 듣네. 힘들 땐 성을 내세요. 그래야 정법 당간, 사회정의, 인과응보의 질서를 세울 수 있어요. 너무 참으면 스트레스가 생기고, 그것이 쌓이면 병이 된다고요. 암의 제일 큰 원인이 바로 스트레스예요.

신자: 폭풍우가 그친 뒤 밤하늘에 뜬 맑은 별들을 보신 적 있으세요? 어느 날 그 별들이 제게 큰 깨달음을 주었어요. 제가 그 사람에게 분노하는 건 사랑하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분노는 저를 해쳐요. 제가 만든 제 지옥이에요. 이젠 편안하게 살도록 저를 용서해야겠어요. 지옥에서 나와야겠어요. 그런 깨달음을 얻은 뒤로부터는 별들에게, 부처님께 그 사람의 안녕을 빌었어요.

스님: 아이고, 보살님, 참 답답하시네. 우리 같은 이를 왜 성직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신자는 무조건 우리 같은 이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천부적으로 정해져 있다, 그래서 성직자라고 부르는 거라고요. 보살님 같은 분들만 있으면 우리 같은 이들, 밥 빌어먹기 난감해요. 아이고, 보살님, 정신 차리고 내 말 좀 들으라고요!

조명이 천천히 꺼졌다. 막이 내려갔다. 관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누군가는 어울리지 않는 함성을 지르고, 누군가는 휘파람을 날렸다. 다시 조명이 켜지고, 막이 올랐다. 열 명 남짓한 출연자들이 모두 무대로 나와 서로 손을 이어 잡고 허리를 숙였다. 희철은 무대 밑으로 가서 준비해 온 꽃다발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50명 조금 넘을까 싶은 관객들이 시나브로 강당을 떠났다. 희철은 객석에 남아 어머니를 기다렸다. 정말로 폭풍우가 지나간 하늘에 뜬 별들이 어머니의 가슴에 속삭였을까? 그래서 과거 어느 시점에 멈추었던 어머니의 감성의 시계가 홱 돌아갔을까? 결국 한철이 메일에 쓴 글이 맞을까? 아니야. 그저 심리치료를 위한 역할극일 뿐이야.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심리가 치료되고 있는 과정이라구. 정말 치료가 되면?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구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옆 동 아파트에 사는 친구 분의 부축을 받으며 희철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희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감싸 잡았다.

“어머니 마음속에 있던 말이 대사로 우러나온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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