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 작가의 장편소설] 기억 ㊸

이정 작가 승인 2021.04.08 00:00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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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하이뎬구(海淀區)의 사무실.

컴퓨터 모니터가 놓인 책상들이 사무실의 좌우 벽을 향해 네 개씩 위치했다. 그 사이에서 갓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했을 나이의 청년 너덧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종이박스들을 뜯어 컴퓨터를 조립하거나 책상 위에 배치했다. 컴퓨터 부품들과 그것들을 포장했던 비닐과 스티로폼, 간단한 공구들이 바닥과 책상 위에 어수선하게 널렸다. 희철과 정현은 그들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좀 떨어진 곳의 창가에 서 있었다.

“여덟 명 다 수재급 프로그래머디. 이 인원으로 못하는 일감은 평양에 보내서 거기 전문가들을 동원해 해결할 거야.”

희철은 지하철을 타고 도심 밖에 있는 정현의 새 사무실을 찾아왔다. 정현은 소프트웨어 개발 용역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프로그래머들을 데리고 나왔다. 모바일 게임도 개발하고, 문자나 영상, 지문, 얼굴 인식 응용 프로그램도 개발할 수 있다고 했다. 강수처럼 근육을 써야지 왜 머리를 쓰려고 하느냐고 비야냥댔지만, 전날처럼 대치상태로 일관하지는 않았다.

“일감은 준비돼 있어?”

“부탁하고 싶은 게 기거야. 남쪽 일감을 주선해 달라 머. 남쪽 당국이 일감을 못 주게 하는 건 알아. 살짝 달라. 중국 회사를 경유해서 일하는 걸로 하면 되디 머. 정 원한다면 내가 희철 선생 아버지와는 어떤 연관도 짓지 않갔으니까니 안심해.”

프로그래머들이 들을까 봐 정현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내가 감옥에 가는 꼴을 보려고? 아무리 중국 회사를 내세운다 해도 곧 들통 나게 돼 있어. 오래 전 남쪽의 어떤 회사가 그런 식으로 몰래 평양 측과 일을 했다는데, 평양 측이 프로그램 안에다가 바이러스를 심어서 한국의 국가기관 해킹공격에 이용했다던데? 신문에 다 났어.”

“나는 그딴 짓은 죽어도 안 해. 개발 프로그람 소스까지 다 제공해 줄 수 있어. 이제 서로 걸림돌로 살지 말고 디딤돌로 살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희철은 정현의 제안을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말처럼 나쁜 짓을 안 한다고 해도 나중까지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대화는 겉돌았다. 하지만 이래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현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안온했다.

“탈북 안 해?”

희철은 정현의 귀에 대고 살짝 물었다. 정현이 희철의 가슴을 툭 쳤다.

“기게 능사라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 공화국을 둘러싼 벽에다 문을 내는 일을 할 거야. 공화국 발전의 디딤돌이 되어야지.”

“안에서 깨고 나오는 것보다 밖에서 깨고 들어가는 것이 나을 텐데?”

“아이, 자꾸 기런 말 하지 마. 누가 듣겠어. 희철 선생이나 할 도리를 제대로 해. 알짜배기 통일일꾼이 돼 보라고.”

정현이 먼 하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부탁이 있어.”

희철이 멋쩍게 웃었다.

“은정 씨한테 물어봐 줘. 언제쯤 공화국에서 이름 있는 피아니스트가 될 거냐고? 그리고 통일은 언제 될 거냐고?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해 달라고…….”

정현이 희철을 따라서 빙긋 웃었다.

“정현 선생은 보위원 훈련을 받다가 만 것 같아.”

희철이 정현의 등을 툭 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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