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 ‘논두렁 시계’ 조작...“MB도 수사해야”
“당시 주범들 국정원에 잔존"... 새누리·보수지 ‘침묵’
[토요경제=뉴스팀] 국정원이 지난 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국면에서 ‘시계 언론플레이’ 공작에 직접 나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사건은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언론보도 등은 국정원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는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57·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발언에서 시작됐다. 당시 이 전 부장은 노 전 대통령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회갑선물(시계) 등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9년 4월30일 대검 중수부에 소환됐다. 언론은 그의 소환 과정을 생중계했고, 검찰 발 속보 받아쓰기에 급급했다. ‘무리한 검찰 수사’와 ‘받아쓰기 언론’은 노 전 대통령 죽음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명품 시계 강조한 KBS·조선일보의 언론 플레이
연합뉴스는 2009년 3월 31일 ‘박연차, 미술품 구입도 ‘큰 손’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에게도 고가의 시계를 생일선물로 주는 등 ‘시계 로비’를 벌인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혹 근거는 “박 회장은 또 수년 동안 수억 원짜리 명품 시계를 구입하는 등 시계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4월 22일 언론은 다시 ‘명품시계’를 주목했다. KBS 메인뉴스는 이날 ‘회갑 선물로 부부가 억대 시계’라는 단독 리포트에서 “지난 2006년 9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 측에 고가의 명품 시계 2개를 건넸다. 보석이 박혀있어 개당 가격이 1억 원에 달하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위스 P사의 명품 시계였다”고 밝혔다.
이러한 보도가 나온 시점은 검찰이 정황만으로 수사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던 때였다. 노 전 대통령은 박 전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를 수수한 혐의로 수사 받고 있었고 검찰은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다음날 진보·보수 언론을 막론하고 이 소식을 1면에서 전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4월 24일 5면 “국내 매장에 5~6개뿐… 문재인 ‘망신주자는 거냐’”를 통해 스위스 P사가 ‘피아제’였다고 밝혔다. 본질과 무관한 기사들이었다.
한국일보는 檢 “억대 시계 정보 흘린 나쁜 빨대 색출”이라는 기사에서 시계 보도에 대한 검찰 반응을 보도했는데, 당시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은 “우리 내부에 형편없는 ‘빨대’(취재원을 지칭하는 은어)가 있는 데 대해 굉장히 실망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경향은 지난 25일 “빨대 논란에 대해 검찰의 추적 조사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국정원 작품에 ‘논두렁’ 따라 쓴 언론들
이 전 부장에 따르면, “권양숙 여사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언론보도”는 국정원이 주도한 것이다.
이 전 부장은 “(검찰이) 노 전 대통령에게 ‘시계는 어떻게 하셨습니까’라고 묻자 노 전 대통령이 ‘시계 문제가 불거진 뒤 (권 여사가) 바깥에 버렸다고 합디다’라고 답한 게 전부”라며 “논두렁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식으로 (국정원이) 말을 만들어서 언론에 흘린 것”이라고 말했다.
SBS 메인뉴스는 2009년 5월 13일 단독 리포트 “시계, 논두렁에 버렸다”에서 “지난달 30일, 검찰에 소환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병우 중수1과장으로부터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명품 시계를 받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며 “이 시계는 박 전 회장이 지난 2006년 회갑 선물로 노 전 대통령 부부에게 전달한 것으로 남·녀용 각각 1억 원을 호가하는 고가품”이라고 밝혔다.
▶“봉하마을 논두렁 시계나 찾으러 가자”
SBS는 “이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권 여사가 자기 몰래 시계를 받아 보관하다가 지난해, 박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시계 두개를 모두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비싼 시계를 논두렁에 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집에 가서 물어보겠다며 노 전 대통령이 답변을 피했다고 검찰은 밝혔다”고 전했다. 그러나 논두렁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명확하지 않다.
국민일보는 14일자 3면에서 “권 여사는 또 박 전 회장에게 회갑 선물로 받은 1억 원대 명품시계 2개를 검찰 수사가 시작된 직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 인근 논두렁에 버렸다고 검찰에 알려온 것으로 전해졌다”고 썼다. 세계일보도 사설에서 “선물로 받은 1억 원짜리 시계 2개를 논두렁에 버리고, 미국 주택 매매계약서를 찢어 없앴다는 의혹은 또 무엇인가”라고 했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 “盧측 버린 2억 시계 주우러 가자”를 통해 “봉하마을에서 일부 관광객은 취재진에게 ‘노 전 대통령의 사저에서 가까운 논두렁이 어디냐’고 묻는 등 명품 시계에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 누리꾼은 ‘이 불경기에 1억 원이나 하는 시계를 미련 없이 논두렁에 버린 게 사실이라면 오리농법 논두렁으로 달려가자’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경향신문은 서거 당일인 5월23일자 22면에 ‘시계나 찾으러 가자!’는 제목의 김건중 살레시오 수도회 구로 3동 주임신부 칼럼을 실었다. 김 신부는 “다가오는 방학 때는 고생해서 몇 십만 원 벌려는 아르바이트 걱정을 하지 말고 애들에게 봉하마을 논둑길에 버렸다는 시계나 찾으러 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금품수수 혐의 본질 아닌데도 이를 전면에 부각
지난 2009년 원 당시 국정원장은 노 전 대통령을 소환하기도 전에 대검에 직원을 보내 국정원 견해를 전달했다. 이 직원은 이 전 중수부장에게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 기소하되 시계 얘기는 흘리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인규 중수부장은 이를 거절했지만, 국정원이 대검 수사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불만이 검찰 내부에 급속도로 퍼졌다.
국정원 ‘지침’은 전직 대통령 불구속으로 여론 역풍은 최소화하면서도 그에 대한 비난은 최대한 끌어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한마디로 노 전 대통령 망신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받은 회갑선물은 노 전 대통령의 금품수수 혐의의 본질이 아닌데도 이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논두렁에 버렸다’는 내용은 국정원 작품
이 전 중수부장이 “‘논두렁에 버렸다’는 내용은 국정원 작품”이라고 말한 점을 고려하면 국정원이 상징적이고도 쉬운 단어를 붙여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네이밍(이름 붙이기)’ 효과를 노린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논두렁’ 얘기가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누리꾼 등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논두렁에 가서 명품 시계를 찾아보자”는 비아냥도 쏟아졌다.
시계에 관한 혐의사실 유포도 국정원 측이 주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검찰 관계자들의 설명으로는 수사기법상 시계 얘기는 언론에 공개하지 않으려 했는데도, 소환 직전 이 문제가 언론을 통해 집중 제기됐다. 노 전 대통령 변호를 맡았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사건 본질과 아무 상관없는 일로 망신을 주겠다는 비열한 짓”이라고 반발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국정원이 이 같은 여론전을 시도한 것은 2008~2009년 정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무현 수사’가 이뤄진 2009년은 MB 집권 2년차로, 촛불집회 등으로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정권의 위기’라는 말도 공공연히 나오던 시점이다. 원 전 원장은 MB의 최측근으로 꼽히던 인물이다. MB는 불리한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검찰이 노 전 대통령 수사에 나서자 국정원의 공작이 더해진 것이다.
▶전두환 5공보다 노골적인 국정원의 행태
이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은 지난 26일 이인규 전 중수부장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당시 ‘논두렁 시계’ 진술 조작의 장본인이 국정원이라고 밝힌 것과 관련, MB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등 대대적 공세를 폈다.
우윤근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이 사건은 국정원 직원 몇 명의 개인적 일탈 수준을 넘는 조직적인 중대범죄행위”라며 “검찰은 당장 의혹의 실체 규명을 위한 수사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신경민 의원도 “전두환 5공보다 노골적인 국정원의 행태는 원장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고, 원장의 독단일 수도 없다”며 배후로 MB를 지목한 뒤, “추악한 진실에 대해 원세훈 당시 원장은 물론 MB가 어디까지 개입하고 알았는지 밝히거나 밝혀내기 위해 조사와 수사를 받아야 한다”며 MB 수사를 촉구했다.
그는 이어 “원세훈, 남재준 전 원장이 남긴 수많은 찌꺼기들이 아직도 국정원에 남아서 공무원 봉급을 타며 세금을 축내고 있다. 이병기 원장도 '어쩔 수 없다'고 최근 상임위에서 말했다”며 국정원내 ‘원세훈 찌꺼기’ 숙정도 주장했다.
▶정치권 발칵... 새누리당은 침묵으로 일관
그는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서도 “대통령이 약속한 국정원 개혁을 시늉이라도 내려면 이제 이인규 전 중수부장의 폭로에 대해 청와대는 그만 침묵을 깨고 국정원과 검찰에 대해 조사하고 수사해야한다. 이 전 중수부장 폭로로 볼 때 검찰은 이미 보도경위와 국정원의 수사개입에 대해서 조사를 마쳤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니 이 자료를 내놓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전해철 의원은 “국정원이 공작에 개입했다는 이 전 중수부장의 폭로로 인해 검찰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국정원에 정보를 유출한 직접 책임은 분명히 검찰에 있고, 당시 피의사실 공표라는 위법행위를 검찰은 일상적으로 행했다”고 검찰 책임론을 폈다.
그는 “이 전 중수부장은 지금이라도 바로 전말을 밝히라. 분명한 것은 수사책임자로 거기 따르는 책임은 여전히 유효하다. 당시 수사팀이었던 우병우 씨가 현재 사정라인을 총괄하는 민정수석으로 있는 것도 매우 부적절하다”며 우병우 민정수석 교체도 촉구했다.
한편 이 전 중수부장의 폭로로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음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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