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 납품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달라진 게 없어요. 경기가 어렵다고 세일을 50%나 하면서도 수수료는 예전대로 꼬박꼬박 30%씩 떼어 갑니다. 정부가 나서서 상생이다 동반성장이다 외치지만 그 때 뿐이에요. 일선 점포에선 기존 방식대로 하는 걸요. 그게 싫다면 납품하지 말라고 하는데요”
백화점에 납품한다는 A 중소기업 사장의 하소연이다. 이처럼 대형 유통사의 부당한 횡포와 관행이 벼랑 끝에 몰린 중소기업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정부가 동반성장과 상생경영을 외치고 있지만 중소 납품업체들이 겪는 고통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대형 유통사의 착취 실태를 들여다보고 상생 해결책은 없는지 살펴봤다.
◇ “계약은 甲 마음대로”… 백지계약서 작성
대형 백화점에 처음 물건을 납품하게 된 B 중소기업 사장은 계약서를 받고 깜짝 놀랐다. 계약의 핵심 조건인 정상마진율, 행사마진율, 영업면적과 판촉사원 수가 모두 공란으로 처리돼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느 점포 몇 층에서 판매하는지도 나와 있지 않았다. 백지 계약서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백화점 구매담당자로부터 “빈 칸은 그대로 두고 회사 직인만 찍어라”라는 일방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이와 달리 대형 백화점에 명품을 공급하는 C업체는 오히려 백화점에 갑이다. 소비자들이 이 제품을 찾으니 백화점 담당자도 C회사 관계자를 만날 때 자세가 180도 달라진다. 국내 납품업체와 계약할 때 공란으로 둔 백지 계약서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계약서에는 점포별 정상마진율과 영업면적 게다가 판촉사원 수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현행법상 대형 유통업체가 납품업자와 계약을 맺을 때는 완결된 계약서를 납품업체에 줘야 한다. 올 1월부터 시행된 대규모 유통업법에 따라 판매수수료율(판매장려금률)이나 상품대금 지급 조건, 판촉사원 등을 명시하도록 돼 있지만, 백화점과 대형마트들은 이를 암암리에 묵인하고 본인들이 유리한 방식대로 공란을 채운다. 이른바 백지 계약서다.
대형 유통업체들은 중소 납품업체와의 갑을 관계를 악용해 백지 계약서를 넉넉하게 받아놓은 뒤 수시로 변경되는 계약조건을 채워 넣거나 아예 계약기간이 끝난 뒤 형식적으로 계약서를 작성해왔다. 상황에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재해 부당이득을 취해온 것이다. 공정위는 “대형 유통업체의 백지 계약 관행은 납품업체에 과도한 판촉비용을 부담시키거나 지나치게 많은 판촉사원을 요구하는 등의 불공정 행위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백화점은 납품업체로부터 상품을 외상 매입해 판매한 뒤 판매수수료를 제외하고 납품대금을 지급하는 특약매입 방식의 거래를 한다. 백화점들은 이런 계약 형태의 특성을 이용해 중소 납품업체들과 계약할 때 핵심 내용을 공란으로 남겨둔 경우가 많다.
직매입 거래를 하는 대형마트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반적인 계약 내용은 전자계약으로 체결한 뒤 핵심적인 내용은 부속 합의서에 담고 있는데, 여기서도 납품업체 명판과 인감만 찍은 상태에서 나머지는 공란으로 남겨둔 사례가 빈번하다.
이들은 또 국내 중소기업에 대해선 공란 계약서를 통해 불공정거래를 체결한 반면, 해외 유명 브랜드와의 계약에서는 핵심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등 이중적인 계약 태도를 보였다.
이런 지적에 대해 대형 유통업체도 할 말이 많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명품업체든 중소기업이든 기본 계약은 요즘 다 전자식으로 하기 때문에 백지 계약서는 말이 안 된다. 판촉행사를 위한 부속계약서를 쓸 때 업무 효율상 공란을 두는 경우가 있는데, 판촉행사를 안 하는 명품업체의 본계약서와 중소기업의 부속계약서를 직접 비교하는 건 무리”라고 반박했다. 대형마트 관계자도 “행사가 많아 수시로 계약 상황이 바뀌는 영업 특수성을 갖고 있어 명판과 직인이 찍힌 공(空)계약서를 미리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항변했다.
이동원 공정위 기업협력국 과장은 “원계약이든 부속계약서든 공란으로 이뤄지는 백지 계약은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며 “이를 어겼을 경우 납품 금액의 100%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징금을 물릴 수 있다”고 말했다.
◇ 판매수수료 내리지만, 납품업체 부담은…
공정위 압박에 못 이긴 업체들이 판매수수료율을 낮췄지만 납품업체의 부담은 크게 줄지 않았다. 줄어든 수수료만큼 인테리어비, 판촉비, 물류비 등 다른 추가 비용이 늘어난 풍선효과 때문이다. 가령 TV 홈쇼핑에서 30만원짜리 여성 정장을 사면 12만4000원은 홈쇼핑에 돌아간다.
그나마 이는 지난해 수수료(41.37%)보다 소폭(1.05%포인트) 내린 수치다. 백화점도 찔끔 내리긴 마찬가지. 백화점에서 20만원짜리 셔츠를 사면 이 중 7만원은 백화점의 몫이다. 셔츠의 백화점 판매수수료율은 35.89%로 지난해보다 0.18%포인트 낮아졌다.
대형 유통업체의 판매수수료는 2010년과 2012년을 계약서 기준으로 비교할 때 백화점은 29.7%→29.2%, TV 홈쇼핑은 34.4%→34%, 대형마트(판매장려금)는 5.4%→5.1%로 눈곱만치 내렸다. 업체별로는 백화점 중엔 롯데백화점(29.6%), 대형마트는 롯데마트(7.1%), TV 홈쇼핑은 현대홈쇼핑(36.3%) 판매수수료율이 가장 높았다.
대형마트는 판매장려금으로 납품업체들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대형마트는 납품업체의 상품을 매입해 일정 마진을 붙여 판매한다. 여기에 더해 납품업체의 매출 중 일부를 판매장려금으로 따로 챙긴다. 수익을 이중으로 챙기는 셈이다. 이마트의 판매장려금률(62개 납품업체 평균)은 2001년 6.02%에서 2012년 9.9%로 뛰어올랐다. 납품업체의 매출이 계속 늘어나면 판매장려금률을 낮춰도 판매장려금 수익은 늘어난다. 그런데도 대형마트는 판매장려금률을 높인 것이다.
판매수수료율이 낮춰졌을지 몰라도 인테리어비, 판촉비 등 다른 비용은 크게 늘어났다. 공정위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백화점 3사가 납품업체로부터 받은 인테리어비는 총 2688억원(점포당 4770만원)으로 2010년보다 22.5% 늘었다. 백화점은 인테리어가 중요해 납품업체 부담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판촉비는 지난해 총 114억원(점포당 140만원)으로 1년 새 28% 치솟았다.
◇ “직원 파견 안 하면 계약 해지”
납품업체는 대형 유통사에 사원들을 파견해 판촉활동을 도와야 한다. 이 부담마저 크게 늘었다. 대형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중소기업 D사는 매일 3명의 판촉사원을 백화점 각 지점에 의무적으로 파견한다. 최소 이 인원을 유지하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판촉사원 인건비로 들어가는 돈이 1년에 평균 4억원이 넘는다. 매출의 10%나 되는 비용을 부담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2009년 3만명가량이던 3대 마트의 판촉사원 수는 지난해 4만3000명으로 급증했다.
공정위 측은 “판매수수료는 하향 안정화되고 있지만, 유통업체의 독과점이 심화되면서 추가 비용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백화점 한 관계자는 “매출과 점포 수가 늘면 당연히 물류비나 판촉비, 인테리어비가 느는 건데, 이를 감안하지 않고 통계를 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인 손실을 감안하더라도 진정한 상생 파트너십을 마련해야 중장기적으로 동반성장이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정희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교수는 “대형 유통업체가 상생을 한다고 말하지만 언제나 정부 눈치를 보면서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자체브랜드(PB) 상품만 해도 여전히 납품업체 주도로 포장만 바꿔서 출시되는 실정이다. 대형 유통사가 납품업체와 실질적으로 제품을 공동개발하고 비용도 분담하면서 이끌어주면 새로운 상품과 수요가 창출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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