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마약이다. 고리원자력본부 직원이, 그것도 재난안전팀 직원이 사무실 내에서 필로폰을 투약한 사실이 검찰에 적발돼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고리원자력본부는 터빈밸브작동기 납품 비리가 드러나 큰 물의를 일으키자 지난 7월 12일 ‘비리척결 및 안전운영 다짐대회’를 열고 국민의 신뢰를 되찾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런 다짐이 있은 지 불과 2개월 만에 마약 사건으로 온 국민을 충격에 빠트리면서, “직원 기강을 바로잡겠다던 약속은 공염불로 그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 자신의 사무실에서 마약… 원전 측은 ‘문제 없어’
부산지검 강력부(부장검사 조호경)는 지난 22일 고리원전 재난안전팀 직원 2명을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부산지검 관계자는 “이들은 이번 달 초부터 최근까지 2차례 필로폰을 투약한 사실을 파악했다”며 “특히 이들 중 1명은 자신이 근무하는 고리원전 재난안전팀 사무실에서 마약을 투약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들이 부산 기장군을 무대로 활동하는 폭력조직 관련자로부터 히로뽕을 사들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에 구속된 2명은 원전 시설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화재 등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고리원전 측이 별도로 운영하는 소방대원이다.
자사에서 근무하는 소방대원이 마약 투약 혐의로 구속됐음에도, 고리원전 측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고리원전 관계자는 “이번 마약투약 혐의로 구속된 소방대원은 발전소 안전운전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직원들”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으로 일관했다.
그러면서 “발전소 운전에 직접 종사하는 직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동안 약물검사 대상에 제외돼 있었다. 향후 범위를 확대해 검진대상에 포함시키도록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납품 비리 파문’ 잊혀지기도 전에…
이번 마약 사건 이전에도, 고리원전은 납품 비리 파문 탓에 이미 국민의 신뢰를 잃은 바 있다. 감사원 감사 결과 고리원전이 터빈밸브작동기를 55억9000만원이나 비싸게 구매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감사원은 납품 비리와 관련된 첩보를 바탕으로 지난해 11월2일부터 15일동안 고리원전과 한전KPS를 대상으로 감사를 벌여 터빈밸브작동기 구매요청 업무를 부당하게 처리한 한국수력원자력 직원 3명을 적발해 해당기관에 인사자료 통보를 했다고 6일 밝혔다.
감사원에 따르면 한수원은 원자로에서 터빈으로 공급되는 증기의 양을 조절하고 차단하는 발전소의 핵심설비인 터빈밸브작동기를 협력업체 H사와 수의계약으로 구매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조사결과 2008년 터빈밸브작동기의 적정가격은 대당 4억3393만원이었지만 한수원은 이보다 휠씬 비싼 대당 6억2425만원에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에 적발된 직원들은 당시 고리원전에서 터빈밸브작동기 구매시방서를 작성하거나 기술검토와 구매요청업무를 맡으면서 제외해야하는 시험장치비와 프로그램개발비를 포함시켜 적정가보다 높은 구매예정가를 정해 한수원 본사 자재처에 통보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때문에 한수원이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차례에 걸쳐 H사로부터 터빈밸브작동기 35대를 구매하면서 적정가(149억8000만원)보다 55억9000여만원이나 비싼 205억7000여만원을 지불했다는 것이 감사원의 조사결과다.
이에 대해 해당 직원들은 “터빈밸브작동기에 재질변경ㆍ설계변경ㆍ연구개발비 등이 추가로 들어갔기 때문에 적정가보다 비싼 가격에 구매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감사원은 “이들의 해명은 업체에서 제출한 자료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근거가 없다”며 “징계 시효가 지났지만 재발방지 차원에서 엄중한 인사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원자력발전소 내 부품을 무단 반출하고 엉터리부품이 포함된 터빈밸브작동기의 납품검사 업무를 부당하게 처리한 고리원전 2발전소 신모 과장(구속)을 해임할 것을 한수원에 통보했다. 또 고리원전에서 2007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반출된 물품이 2841건이었고 이중 19건이 미반입 상태로 나타났다며 반출부품이 재사용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 ‘환골탈태’ 하겠다더니…
검찰의 납품비리 수사결과가 발표된 지난 7월, 고리원자력본부는 ‘비리척결 및 안전운영 다짐대회’를 통해 ‘환골탈태’의 의지를 대ㆍ내외에 천명했다.
이영일 본부장을 비롯한 고리원전 직원 2200여명은 대회를 통해 “땅으로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고 새롭게 태어나겠다”며 경영쇄신에 주력할 것을 약속했다. 또 “비리척결과 원전안전운영이 국민 신뢰 및 기업 존속의 근본임을 통감한다”며 “뼈저린 자기반성과 환골탈태의 의지를 담아 국민의 신뢰를 받는 투명한 기업을 만들어나가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직원들은 이어 △청렴하고 깨끗한 한수원 구현을 위해 지금부터, 나부터 부패척결에 앞장선다 △금품수수, 횡령, 알선 및 청탁 등 3대 비리를 근절하며, 비리 발생 시 연대해 책임진다 △청렴 행동강령을 준수해 협력사와는 어떠한 부당 거래도 하지 않으며, 우월적 지위도 남용하지 않는다고 결의했다.
또 △발전소 운영규정과 절차를 엄격히 준수하고 안전문화 증진과 인적오류 예방에 최선을 다한다 △최상의 설계ㆍ제작ㆍ시공 품질확보와 설비관리로 세계 최고의 원전안전성을 확보한다 △위기상황에 대한 철저한 대비와 훈련으로 국민안전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고 결의하고, 이 같은 사항을 위반했을 경우에는 어떠한 처벌이나 불이익도 감수한다는 내용의 결의서약서에 서명했다. 아울러 직원들은 각 원전본부 인근 지역에서 ‘10만 시간 사회봉사’에 착수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하지만 납품 비리에 마약사건까지 터지면서 이런 선언이 무색해지자, 고리원전을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이 “더 이상 염치가 없어 사과도 못하겠다”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서울 삼성동 한수원 본사에는 사건 적발 다음날인 지난 26일 아침 일찍부터 마약사건과 관련한 문의 전화와 항의 전화가 쇄도했다. 김균섭 한수원 사장은 부랴부랴 임원 회의를 소집해 직원들의 근무기강을 강하게 질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수원 직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이번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해 한수원이 내놓은 대책은 고작 약물복용 검사와 정신건강 검진을 소방대원들에게도 실시하겠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어 이번 사건을 회사 측이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발전업계 한 관계자는 “한수원이 그동안 뇌물사건을 계기로 직원들 기강을 바로잡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헛구호가 됐다”며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정식 시민단체 활빈단 대표는 “원전사고 예방에 앞장서야 할 원전요원들이 국민 생명을 담보로 마약을 흡입하는 등 요지경판을 만들고 있다”며 “마약투약자 적발을 포함한 원전 부패비리 전반에 걸친 국민감시 및 척결NGO를 발족하겠다”고 선언해, 이번 사건이 일파만파로 확산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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