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희용
내외정책홍보원 원장
전 국정신문 편집장
고향이 남쪽인 그는 빈농의 칠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간신히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진학을 위해서 상경을 한 것이 아니라 취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부모가 일구는 농사만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맏이인 그가 벌지 않고서는 여섯 동생들은 학교는커녕 밥도 굶을 처지였다. 그래서 고향사람이 한다는 서울변두리 나무젓가락공장을 찾아 무작정 상경을 했다. 그때가 1960년대 초.
어렵사리 찾아든 공장에서 그는 사환 겸 밥떼기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원자재인 나무토막이 쌓인 구석에 비닐과 이불을 깐 곳이 그의 숙소였다.
월급이랄 것도 없었다. 사장이 이따금씩 쥐어주는 푼돈이 그의 급료였다. 그 돈을 아끼고 또 아꼈다가 고향에 계신 아버지한테 부쳐드렸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서툰 글씨로 편지를 보내주셨다.
'맏이야 보아라…(중략) 몸성히 잘 있거라.'로 끝나는 짧은 편지였다. 문득 그가 지갑에서 꺼낸 작은 편지지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의 부친이 보냈다던 편지였다.
을미년 벽두. 안부를 나누고자 여러 달 만에 필자와 마주앉은 주점에서 소주잔을 나누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벌써 50여년도 지난 편지였다. 그는 그 편지를 늘 가슴에 품고 살았노라고 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필자도 울었다.
그의 신산했던 젊은 날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공장을 그만둔 그는 시중에 있는 음식점 종업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은 얼마든지 해도 좋은데 밥이라도 많이 먹고 싶었단다. 마침 후덕한 주인을 만나 주방에 잠자리까지 달린 식당에서 새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 달마다 주는 급료도 예전에 비하면 훨씬 많았다. 어느 해인가는 부모님과 두 동생에게 서울구경도 시켜드렸다. 워낙 부지런하고 성실했던 그를 친자식처럼 대해주던 주인 덕에 그곳에서 주방 일을 배울 수 있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되던 해에 작은 음식점을 차릴 수 있었다. 주인이 무상으로 빌려준 돈과 단골손님이 쥐어 준 돈으로 차린 새로운 일터였다. 바로 아래 동생을 불러올려 허드렛일을 맡겼다. 눈물이 날 지경으로 장사가 잘되었다. 원근을 마다않고 단골손님들이 찾아 주더란다. 불과 1년여 만에 식당주인이 빌려준 돈에 이자까지 더해 갚았다. 그리고 목돈을 쥐어 준 어른께도 넉넉하게 돌려 줬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렇게 10여년을 사는 동안, 고향에 계시던 부모님과 남은 형제들도 서울사람이 되어있더란다. 어언 부모님 작고하시고 동생들도 모두 시집 장가보내고 나니, 식당 집 아줌마로 살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하직했다고. 평생 손에 물기가 마를 날이 없이 고단을 달고 살던 아내였다. 삼남매의 엄마였다. 기가 막혔다.
요즘 인기리에 상영 중인 영화 '국제시장'을 본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가 털어놓은 자전적인 인생살이였다. 그의 전력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듣기는 처음이다.
"…그래도 그때는 일한만큼 뭔가 거둘 수 있는 사회적 바탕이 되어있었지. 지금은 상대적 빈곤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세상이라는 게 절망감으로 바뀌어 젊은이들을 압박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답답하지 뭐"
그의 관심은 자식의 자식들에게 있었다. 심란하고 고단했던 시절을 거쳤지만, 어쩌면 그러한 세월은 누구나 겪어야만 했던 하나의 과정이었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이 겪어야하는 과정은 어쩌면 결과나 결실이 막연한 세상이 되는 게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드리워져 불안한 것이다. 연말년시에 터진 '있는 자와 없는 자' 간에 벌어지는 행태를 보면서 자연히 머금는 걱정의 실체가 그런 것이다.
일구월심 경제성장이 최선인 세상에서 철지난 듯한 이런 이야기가 우리네 심상에 흐리나마 빛을 드리우는 것 또한 하나의 등대임을 간과할 수만은 없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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