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행논란과 관련해 마지막까지 억울하다는 입장을 강조한 박 감독은 그러나 구단주인 이재명 성남 시장이 피해를 보는 것이 미안해 스스로 입장을 정리했다고 밝혔다. 박종환 감독의 연령을 고려할 때 사실상 마지막이었을 도전.
우리나라 축구 사상 첫 세계 4강 쾌거를 이끌며 한 때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축구인의 말로로서는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이다. 2006년 10월, 대구FC 감독에서 물러난 뒤 8년 만에 K리그 사령탑을 맡으며 축구인생 최후의 방점을 찍고자 했던 박종환 감독의 마지막 승부는 결국 4개월 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축구 ‘붉은 악마’의 기원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공식 서포터즈를 지칭하는 ‘붉은 악마’는 원래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하여 이제는 전 세계에서 ‘붉은 악마’(Red Devils)라는 이름이 ‘대한민국 축구’를 상징하는 대명사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보다 먼저 ‘붉은 악마’라는 애칭을 들었던 나라는 지난 90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우리와 싸웠던 경험이 있으며, 이번 월드컵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은 조에 속한 벨기에였다.
벨기에는 지금으로부터 108년 전인 지난 1906년,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상대로 3연승을 달리며 처음으로 ‘붉은 악마’라는 별명을 듣게 됐다. 이는 전통적으로 붉은색 유니폼을 입는 벨기에 축구대표팀에게 기인한 것이다.
기 타이스(Guy Thys) 감독의 지도 아래 체격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벨기에는 얀 쾰레만스(Jan Ceulemans), 장 마리 파프(Jean-Marie Pfaff), 에르빈 판던베르흐(Erwin Vandenbergh)등의 활약 속에 1980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세계 무대에 다시 명함을 내밀었고, ‘벨기에의 검은 진주’라 불린 엔조 시포(Vincenzo ‘Enzo’ Scifo)와 니코 클라에센(Nico Claesen)이 가세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마라도나의 활약을 앞세운 우승팀 아르헨티나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4강의 위업을 달성하며 다시 한 번 ‘붉은 악마’의 위용을 과시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붉은 악마’라는 명칭은 1990년대 후반, 98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결성된 국가대표팀 서포터즈의 공식명칭을 공모하면서 조직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기원은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예상치 못한 4강 진출을 이룩하며 외신으로부터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는 애칭을 선사받았던 우리 청소년 대표팀을 국내에서 ‘붉은 악마’로 소개하면서 부터였다.
‘축구영웅’ 박종환
당시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머물러 세계 대회에 나갈 수 없었던 우리나라는 북한이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 주심을 집단 폭행하는 사고를 저질러 아시아축구연맹(AFC)으로부터 2년간 출전 자격을 박탈당하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출전권을 얻게 됐다.
스코틀랜드, 호주, 멕시코와 A조에 포함됐던 우리나라는 첫 경기에서 스코틀랜드에게 0-2로 패했지만 멕시코와 호주를 2-1로 연파하고, 2승 1패의 성적을 거두며 A조 2위로 결선 8강에 올랐다.
우루과이와 펼친 8강에서 우리나라는 1-1의 동점에서 맞이한 연장에서 신연호의 결승골로 2-1의 승리를 거두고 4강에 오르며, 처음으로 축구 국제대회 4강의 위업을 달성했다. 비록 대회 우승팀이었던 브라질에게 1-2로 아쉽게 패하고, 3,4위전에서도 폴란드에게 연장 끝에 1-2로 무릎을 꿇었지만,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차범근과 국내에서 개막한 프로축구와 맞물려 축구 열기를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대회에서 큰 활약을 펼쳤던 김종부, 신연호 등을 이끌었던 박종환 감독은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성남FC의 전신인 일화 천마 축구단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한 박종환 감독은 1993년부터 95년까지 정규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95년에는 아시아 정상에도 올라서며 성남이 K리그 최다 우승팀으로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명장’ 박종환의 감독 잔혹사
박종환 감독은 엄격한 훈련을 바탕으로 한 소위 ‘스파르타식’ 지도자의 전형으로 꼽히고 있으며 강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선수단을 이끄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반면 소통이 부족하고 강압적인 면이 많아 선수단과의 마찰이 자주 발생한다는 문제가 꾸준히 이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로 인해 박종환 감독은 1983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와 일화 시절의 3연패 당시를 제외하고는 지도자로서도 그다지 만족스러운 길을 걷지 못했다.
83년 멕시코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박종환 감독은 조윤옥 감독에 이어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올라 LA올림픽을 준비하게 됐지만, 강압적인 훈련방식에 불만을 품은 5명의 선수가 선수촌을 이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대표팀의 주축이었던 이태호, 변병주, 최순호, 박경훈, 최인영 등이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표팀 이탈사태를 일으킬 정도로 내홍을 겪었던 대표팀은 결국 사우디에게 밀려 LA에 가지 못했고, 박종환 감독은 대표팀에서 물러났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 이후 김정남 감독이 물러나자 다시 지휘봉을 잡은 박종환 감독은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며 대표팀을 이끌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 리허설의 형식을 띄고 있던 제 17회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4강에서 체코에게 패한 뒤 3위를 차지하자 박종환 감독은 돌연 사표를 발표했다. 올림픽이 두 달 남짓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후 일화 축구단을 맡게 된 박종환 감독은 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목표로 대표팀을 다시 지도하게 됐지만, 4강에서 이란에게 0-1로 덜미를 잡히며 목표달성에 실패했고, 대회가 끝나자마자 지휘봉을 내려놨다. 95년 4월에 다시 한 번 대표팀 감독에 취임한 박종환 감독은 코리아컵으로 이름을 바꾼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 약체 잠비아에게 2-3으로 패하자 부임 3달도 채우지 못하고 감독에서 퇴진했다.
K리그에서 소속팀을 이끌고 리그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하자 6개월 만에 박종환 감독에게 또다시 감독의 기회가 왔다. 하지만 베이징에서 박종환 감독의 발목을 잡았던 이란이 다시 한 번 걸림돌이 됐다. 알리 다에이(Ali Daei)에게 해트트릭을 내주는 등 2-6으로 대패한 대표팀은 8강 탈락의 수모와 함께, 일부 선수들의 항명 의혹까지 일며 어수선한 분위기가 일었고, 박종환 감독은 다시 퇴진했다.
여러 차례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지만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던 박종환 감독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당시 거스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이 대회 6개월 전까지 여러 선수를 시험하고 대표 명단을 확정짓지 않자, “한국은 네덜란드와 다르다. 정예맴버를 소집해 조직력 향상에 집중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유럽 강호들과의 연습경기에서 대표팀이 연 이은 대패를 당하자 “아직 늦지 않았다”며 자신에게 대표팀을 맡겨 달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박종환 감독은 이후 2003년 대구 FC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여 2006년까지 팀을 이끌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지난해 12월 성남FC 감독으로 선임되어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현장에 복귀하며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결국 불명예스러운 마지막을 장식하게 됐다. 사퇴를 발표한 후에도 박 감독은 자신의 행동이 폭행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어쩌면 이는 ‘구태 지도자’라는 틀을 떠나 오랫동안 구축된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의 관습에서 비롯된 비극일지도 모른다.
사진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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