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출금통장 고객을 잡아라!”

허지인 / 기사승인 : 2012-12-28 11: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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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원가성 예금유치에 사활 건 시중은행들

ㄱ은행 A지점장을 맡고 있는 이 모 지점장은 최근 석 달 간 어느 식당 사장에게 거의 매일 눈도장을 찍었다. 직원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서 명함을 건네는 것으로 얼굴을 알린 후, 고객 접대나 지점 회식 등의 일이 있을 땐 어김없이 이 식당을 주로 이용했다. 그때마다 사장에게 술 한 잔씩 따르며 친분을 쌓았다.


지점장의 속셈은 수시 입출금 통장 거래를 따 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지점장은 “이 식당에 카드 매출로 입금되는 돈만 한 달에 3000만원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 돈을 우리 지점에서 유치한다고 생각해보라. 은행 입장에서는 연 0.1% 금리만 주고 값싸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으니 원가절감이 되는 것이다. 요즘처럼 은행이 대출 금리를 못 올리는 상황에선 이렇게 자금 조달 비용을 낮추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수시 입출금 통장 고객 잡아라!”


그가 지점장을 맡고 있는 ㄱ은행 A지점이 올해 수시 입출금 통장 거래를 새로 뚫은 식당은 70여 곳에 이른다. 월평균 입금액이 300만원이니, 이 식당들을 통해 저금리로 조달하는 돈이 연간 25억원이 넘는다.


ㄴ은행 B지점 김 모 지점장은 전국을 돌아다닌다. 각 지역의 대학교ㆍ대형 병원ㆍ기업체에서 저원가성 예금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서울에서 지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올 상반기에만 경기도 소재 대학 2곳을 새 고객으로 잡았다. 신입생 입학금, 재학생 등록금, 교직원 급여가 입금되는 수시 입출금 통장에 월평균 10억원 정도를 받게 됐다. 김 지점장은 “저원가성 예금 고객만 있으면 독도까지라도 가겠다”고 말했다.


ㄷ은행 C지점 한 모 과장은 최근 케익 한 상자와 꽃 한 송이를 고객에게 전달하고 왔다. 수시 입출금 통장에 항상 2~3000만원 정도의 금액을 고정적으로 유치 중인 고객에게 생일 선물을 증정한 것이다. 한 과장은 “얼마 전까지는 정기예금이나 정기적금을 이용 중인 고객을 대상으로 이런 증정을 해왔는데, 지금은 수시 입출금 통장과 같은 저원가성 예금 고객에게도 증정하고 있다”며 “최근 들어 은행 측에선 정기 예ㆍ적금 고객 보다는 저원가성 예금 고객이 자신의 계좌에 많은 돈을 예치한 경우를 더 선호한다”고 말했다.


“원가 줄여 이익 높여야”… 시중은행, 직원 독려


고객에게 연 0.1% 금리를 주는 수시 입출금 통장을 은행에서는 ‘저원가성 예금(LCFㆍlow cost funding)’이라고 부른다. 연 3~4% 정도의 금리를 지급해야 하는 정기예금에 비해, 이는 자금 조달 비용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는 효자 상품이다. 수시 입출금이라 개별 통장에선 수시로 돈이 빠져나가지만, 은행 전체로는 잔액이 일정 규모로 유지돼 안정적으로 자금 운용을 하고 수익을 남길 수 있다.


저원가성 예금은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중요성이 더 커진다. 대출 금리를 높일 수 없는 상황에서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면 은행의 수익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은행의 수익성을 나타내는 순이자마진율(NIM)은 작년 1분기부터 계속 떨어져 올 3분기에는 2.06%에 그쳤다. 은행권에선 “이런 추세라면 곧 2% 이하로 추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저원가성 예금을 늘리지 못하면 순이자마진율 하락이 가속화될 수 있다.


시중은행들은 적극적으로 저원가성 예금 늘리기에 나서고 있다.


하나은행은 지난 5월 저원가성 예금 확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김종준 행장이 “저원가성 예금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저금리 시대에 수익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며 직원들을 직접 독려해 왔다. 그 결과, 11월 말 현재 하나은행의 저원가성 예금은 13조2430억원으로 연초 대비 5.3% 증가했다.


우리은행도 올 들어 저원가성 예금 규모를 1조6725억원(3.2%) 키웠다.


이순우 우리은행장은 “대출 금리 할인 경쟁에서 이기려면 저원가성 예금이 많아야 한다”며 직원들을 독려하고 있다. 조달 금리가 낮아야 대출 금리도 낮출 수 있다는 의미다.


국민은행의 저원가성 예금은 올 들어 3% 늘어나며 58조7383억원을 기록, 4대 시중은행 중 가장 많다.


서정호 금융연구원 금융산업연구실장은 “저원가성 예금을 늘려 조달 비용을 낮추지 못하면 은행의 수익성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며 “은행이 이익을 확보하지 못하면 예상 못 한 위기가 닥쳤을 때 방어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전체 예금 중 저원가성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수준으로 미국(72%)에 비해 크게 낮은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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