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실의 엄숙한 틀에서 벗어나도 되는 자유는 오직 광대에게 허용된다. 광대들은 왕와 문무백관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소리를 하고 풍물을 두드리고 춤을 춘다. 소리는 일종의 시를 담고 있지만 그 내용이 반드시 고상할 필요는 없다. 고상하고 격조 높은 시문은 장원급제하여 왕 곁에 앉아 있는 선비들 앞에서 더 이상 무슨 재간이 되겠는가. 광대들은 오히려 고상한 왕실의 사람들이 왕 앞에서 함부로 할 수 없는 재담과 재주를 보여주는 게 임무다.
광대들의 극에는 신랄한 사회 풍자가 등장한다. 그것이 또 묘미다. 왕실과 조정에 대한 풍자는 이들에게 대놓고 전할 수 없는 세인들의 말을 왕과 대신들에게 적나라하게 들려주는 장치로 이보다 훌륭한 게 없다. 고대 왕실의 풍습을 보면 광대나 시인을 왕 곁에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야말로 힘없는 백성들의 소리를 권력가들에게 전하며 권력의 잘못을 풍자를 통한 직설로 깨우쳐 주는 장치로 기능했다. 그들은 왜 웃음을 수단으로 삼았을까. 심각한 문제를 너무 진지하게 전달함으로써 벌어질 수 있는 충격을 완화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에도 유랑극단이 등장한다. 삼촌인 클라우디우스가 자기 형인 햄릿 왕으로부터 왕좌를 빼앗기 위해 은밀히 독살했을 거라는 의혹을 품고 있던 햄릿은 덴마크에 도착한 유랑극단을 왕실로 불러들여 공연을 펼치게 한다. 햄릿의 은밀한 부탁을 받은 광대들은 극중에 어느 왕이 독살되는 장면을 집어넣는다. 왕의 귀에 독약을 부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사실 이것은 햄릿이 짐작하고 있던 클라우디우스의 독살 수법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관람하던 클라우디우스는 더 앉아서 보지 못하고 몸이 불편하다며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양심에 가책을 받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왕의 면전에서 ‘당신이 귀에 독약을 넣었지?’라고 한다면 왕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부인하면서 상대를 미치광이 취급을 하고 왕을 모독한 죄를 뒤집어씌워 당장 처형하라고 외치지 않겠는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풍자나 패러디라는 것은, 이처럼 연극의 형태를 빌려 우회적으로 비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직설이 가져올 수 있는 충격을 피하면서 서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완화장치다. 서로 웃으면서 보고 듣고 난 다음에, 비판을 받은 사람은 백성의 분노가 직설로 다가오기 전에 스스로를 개선할 여유를 갖게 된다. 백성은 분노를 다스리면서 권력자의 자기반성을 좀 더 기다릴 여유를 갖게 된다. 지금에야 매스컴이라는 사회적 제도가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지만, 여전히 웃음을 동반한 풍자는 유효하다. 그것이 바로 코미디의 필요성이다.
근자에 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시사성 짙은 풍자극이 늘어나고 있다. 정치권력을 풍자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 사회의 계층간 대립성이 極端적 상황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이쯤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는 권력층이 그 비판의 내용을 수용하려고만 한다면 풍자는 충분히 의의가 있다. KBS-2TV에서 방영되는 ‘사마귀 유치원’이 요즘 풍자극의 대표격으로 꼽힌다. “대학생이 되려면 공부를 조금만 열심히 하면 돼요” “하루 4천3백원씩 10시간 알바를 열심히 해서 먹지 않고 쓰지 않고 꼬박꼬박 모으면 한 학기 등록금이 돼요” “등록금이 떨어지면 또 휴학을 하고 편의점 알바를 일 년 동안 열심히 하면 돼요.”
젊은 방청석의 환호는 그 풍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개그맨 최효종은 ‘국회의원 편’에서도 특유의 입담을 과시했다. 유력자에게 아부하고 정당에 정치헌금을 하면 공천을 받을 수 있다며 “국회의원 되기도 참 쉬워요.”라고 우스개를 했다. 그런데 그 일로 한 국회의원이 고소를 했다. 국회의원 전체에 대한 집단모독의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 국회의원은 자신이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여대생들에게 ‘전부 다 줄 생각을 해야한다’는 등 성희롱성 발언을 했다가 아나운서 단체에 의해 고소를 당했고, 법정에서 아나운서 직업군에 대한 ‘집단 모독’에 해당한다는 유죄취지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코미디언이 ‘국회의원 되기 참 쉬워요’라면서 국회의원을 모독한 것이 죄가 아니라면 자신의 발언도 ‘아나운서 되기 참 쉬워요’라른 취지의 코미디와 다를 게 있느냐는 항변인 듯하다. 글쎄 비교의 번지수가 좀 잘못된 것 같다. 설사 그가 코미디언과 같은 권리(언론권)을 갖고 있다 해도 ‘(몸을) 다 주어야 아나운서가 될 수 있다’는 식의 말은 풍자가 아니라 막말에 불과하다.
이런 엉뚱한 비교로 코미디가 위축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스개로도 말할 수 없는 세상이 되면 사람들의 불만은 직설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란다면 코미디는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다.
정해용 상임 논설위원(peacepress@hanmail.net)
[저작권자ⓒ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