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자식도 자식이지만 그러기 전에 그 어미도 참 독했다고 혀를 찬다. 아이는 전국 같은 학년 아이들 가운데 모의고사 성적으로 4천등 쯤 하는 우등생이다(그 또래 동급생은 전국에 60만명쯤이다). 그 성적도 1등을 강요하는 어머니 앞에 내놓기가 무서워 62등으로 고쳤다. 그런데 어미는 1만명 중 1등에 해당하는 그 (위조된)성적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야구방망이와 골프클럽으로 열 시간쯤이나 체벌하며 전국 1등을 강요했더라나. 아이의 일방적 진술이니 과장이 있었다 치더라도 정황은 그렇다. 그렇다고 본다면 이 사건은 성적 학벌주의에 집착하는 부모와 그 압박을 참고 견디다 못한 자식 사이에 벌어진 사적 폭력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그 것뿐일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밖에는 길이 없었느냐고.
이 질문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것은 수많은 현대인들이 갇혀있는 소외의 벽이다. 그 아이에겐 다른 도피구가 없었을까. 죽이고 싶도록 미운 어머니를 피해 달아날 다른 길이 없었을까.
풍선을 불면 그것은 부풀어 오르면서 몸집이 커진다. 그 이상으로 바람을 불어넣으면 더 이상 부풀 능력이 없는 풍선은 터져버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터지기 전에 만일 어딘가 바늘구멍만한 틈 하나만 있더라도 풍선은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늘구멍만한 탈출구도 없다면 풍선은 터져버리는 수밖에 없다. 정신적으로 연약한 아이에게는 그 어미를 죽이는 것 말고는 아무런 탈출구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아이를 그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구출해줄 사람은 사방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독하고도 가엾은 그 어미는 또 어떻고. 누구 하나 그 편벽된 집착과 히스테리로부터 그녀를 끄집어내 줄 사람이 있었더라면 두 모자가 이렇게 끝간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죽음이 너무나 흔한 세상이다. 죽이기도 죽기도 빈번하다. 연간 사망자 가운데 31%가 자살로 죽고, 또 그 못지않은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대한민국에서만의 현상이 아니다. 멀리 중동에서는 정부군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쏘고, 중국이나 인도에선 대형 건물이 주저앉거나 달리던 열차가 충돌해서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죽고, 미국이란 나라에선 가끔 미치광이들이 백주에 학교 캠퍼스에 나타나 총질을 해댄다. 한 마디로 ‘죽음의 굿판’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굿판’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80년대 중반 서울에선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학생 민주화운동 세력 가운데 한바탕 항의성 자살이 유행을 했다. 분신자살, 투신자살, 그 자살을 두고도 한동안 책임공방이 오갔던 일이 떠오른다. 그 때 한 시인이 일갈했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헌데 그 때는 자살을 해도 이유와 목표가 분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독재정권 물러나라’든가 ‘대통령 직선제 약속을 지켜라’든가. 거기에는 세상이 지금보다 어떻게 나아져야 한다는 나름 분명한 방향제시가 있었다. 그 죽음들이 목적한 바는 어쨌든 이루어졌다.
그런데 지금 이 죽음의 굿판에서는 어떤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는 지향점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당장 고통에서 탈출하기 위한 극단의 선택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묻지마 폭력을 넘어선 묻지마 살인과 묻지마 자살이 늘어난 가운데, 자식이 어미를 찔러 죽이고 은폐한 사건은 이 굿판의 정점을 이루는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도 있다.
이런 시대를 ‘엽기시대’라 부른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엽기인’이다. 원시시대 사람들을 원시인이라 부르듯, 엽기시대를 사는 우리 스스로를 엽기인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정해용 상임 논설위원(peace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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