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선과 강요, 그들은 스스로를 善이라 믿는다

정해용 / 기사승인 : 2012-05-18 15:4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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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세상.”


비단 불평불만이 높은 나라에서만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보다 나은 세상을 추구한다. 당대 현실이 얼마나 더 힘드냐에 따라 목소리의 높이가 달라질 뿐이다. 통치를 받는 서민들의 입에서만 나오는 소리도 아니다. 모든 민주주의 체제하의 정치 지도자들도 민심을 얻기 위해 같은 구호를 공약으로 내세운다. “보다 나은 나라, 보다 나은 우리 고장을 만들겠습니다.”


불만이 많은 사회일수록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이 각별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모순점이 많고 거짓이 많고 행복지수가 낮은 사회일수록 ‘보다 나은 세상’을 내세운 유혹은 더 잘 먹혀든다. 때문에 백성의 불만이 높아지면 그만큼 사회의 안정도 위태로워진다.


민심의 수요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혁신을 약속하는 세력이나 사상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기 때문이다. ‘내세의 평안’을 내세워 혹세무민하는 사교(邪敎)나 점술가들도 늘어난다.


하지만 ‘보다 나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15세기 영국 정치가 토마스 모어는 그것을 ‘유토피아(Utopia)’라 칭했다. U-topia, ‘어디에도 없는 땅’이라는 뜻이다. 배고픈 나라를 개선하여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나라는 밥을 굶던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보다 나아진 세상’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일까.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 욕망을 충족시켜줄 한 없이 더 나은 세상은 땅 위에 없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현세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하늘나라’와 같은 상상의 세상을 꿈꾸기도 했다. 동서고금이 따로 없다. 서양의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라는 사라진 대륙을 상정하여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상상을 제시했고, 동양에서는 이제는 증명할 길 없는 ‘요순시대’의 전설을 통해 유토피아적 세계의 모델로 삼아 왔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는 코케인섬과 아르카디아가 등장한다. 오늘날 중독성 있는 마약의 명칭으로도 사용되는 코케인은 환락과 쾌락이 넘치는 이상사회며, 아르카디아는 편안한 휴식이 있는 이상사회다. 술과 마약과 섹스에 취하여 몽환적인 천국을 체험한다면 그것은 바로 코케인 섬의 사람들이 누렸다는 유토피아를 맛본 것이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아무 것도 안할 수도 있는 천혜 휴양지에서 이곳이 천국이라고 느꼈다면 그것은 바로 아르카디아적 유토피아를 맛본 것일 게다. 문제는 이러한 유토피아는 인간의 현실에서 지속성을 갖기 어렵다는 점이다. 일시적이나마 그런 천국을 맛보는 것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 뿐인가. 유토피아의 추구는 결코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값의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또 있다. 누군가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행복을 유보하거나 양보해야 한다. 토마스 모어가 이상사회로 제시하는 유토피아에서도 대다수 평등한 시민들의 행복한 일상을 위해 충성스런 노예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헌신이 전제되어 있다. 500년 전 영국에서는 노예의 존재라든가 여성의 권리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분과 직업의 귀천 없이 누구나가 평등한 권리와 자유를 누리는 현대사회에서는 과연 누가 노예들을 대신하여 끝없이 헌신하고 봉사하며 나머지 소수의 행복을 뒷받침할 것인가.


문명이 발달하면서 귀족 중심의 유토피아적 상상에 대한 도전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 도전은 세계 근세사에 현실적이고도 정치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귀족 중심의 왕권 사회에 도전한 프랑스 시민혁명을 비롯하여, 교황의 절대권을 뒤집은 프로테스탄트 종교혁명, 신흥 부자들인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여 노동계급이 단결한 프롤레타리아혁명들이 단 100여년 사이에 유럽의 기존 체제를 뒤바꿔놓았다. 그 결과로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공화국이 등장하고, 개신교가 등장하고, 공산진영이 등장했다. 모든 혁명은 혁명에 가담한 불만세력들을 일시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어느 것도 영구적인 개혁을 완성하지는 못한다. 자본주의가 그렇고 개신교가 그렇고 공산주의 진영이 그랬다. 그것은 또 다른 억압을 가져오고 또 다른 불만세력을 낳으며 다시 극복해야 할 구체제로 전락한다.


이 나라에서 오랜 독재와 함께 부패한 지배구조에 대한 반발로 형성되고 이제는 제도권 정당으로 진화한 통합진보당이 요즘 도마에 올라 있다. 이 당을 이끈 핵심 세력(당권파)들은 부실 부정한 당내 경선을 통해 비례대표직을 차지하고 정당득표를 통해 국회의원 당선자가 되었다. 경선 절차의 비민주성이 문제가 되어 진보정당이 심각한 내분 위기에 놓였지만 이들은 사퇴를 거부한다. 과거 부패독재세력에 대항하는 투쟁이 급선무이던 시절에는 다소의 과격이나 편법조차 용인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그러한 타성을 고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다수의 참여단체들이 지지를 철회하고, 국민 일반의 압도적 여론이 이들의 국회의원직 사퇴를 요구하는 현상이 괜한 일이겠는가. 과거 반독재 투쟁이 정의로웠다 하더라도, 그 투쟁의 피와 희생 위에 올라앉아 자기들 소수의 소신을 정의라 고집하고 다수 국민에게 이해를 강요하는 것은 더 이상 정의가 아니라 새로운 독선이며 폭력이다. 그들은 이미 구체제 극복의 주체가 아니라 극복대상으로 전락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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