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가 몰고 온 강풍은 한국 경제를 강타했다. 이후 우리 경제는 생존을 위한 경쟁과 전쟁의 연속이었다.
이런 세태를 풍자라도 하듯 'IMF 한파' 'IMF 무풍지대' 등의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등 우리 사회는 철저히 IMF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로부터 9년 뒤. 한국 경제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한보, 대농, 삼미, 진로 등 대기업이 잇따라 부도를 맞고, 동남아 국가의 외환위기로 인한 금융권 부실과 외화 차입난이 심화되면서 한국 경제는 겉잡을 수 없게 피폐해졌다. 결국 지난 1997년 11월 16일 IMF 캉드쉬 총재가 재정경제부의 요청으로 김포공항 화물창고를 통해 극비리에 입국했다.
그리고 21일 오후 10시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국 경제 역사상 최대 위기이자 금융권과 기업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IMF 프로그램'에 따라 은행 통폐합과 기업 구조조정이 시작돼, 제일 먼저 워크아웃 대상에 해당된 금융부문은 무려 628개 금융기관이 퇴출 또는 합병되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당시 무려 3차례에 걸친 금융구조조정으로 은행권은 대동은행, 장기신용은행, 주택은행과 합병한 국민은행과 상업은행, 한일은행, 평화은행과 합병한 우리은행 등 은행권은 몇 개의 대형은행으로 재편됐다.
현재 8개 시중은행 중 이름을 바꾸지 않은 은행은 4개(국민, 신한, 하나, 외환) 뿐이고, 이중 주인이 바뀌지 않은 은행은 단 3개(국민, 신한, 하나)다.
정부는 이어 부실 기업에 대한 대수술에 들어갔다. 삼성차-대우전자, 현대-LG반도체의 인수합병을 추진했고, 대우를 비롯해 부실기업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기업이 생존 체제로 돌입하자마자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수많은 직장인들이 거리로 쫓겨났다. 이때 IMF가 사회에 미친 영향은 'IMF 한파'를 몰아내고자 일부 관공서에서 당시 난방을 뜨끈뜨끈 때다가 혼쭐이 나는 헤프닝이 일어날 정도였다.
또 당시에는 아토스, 마티즈 등 거품을 빼고 작게, 싸게 만든 이른바 'IMF 모델'이 큰 인기를 누리던 시대였고, 때아닌 특수를 맞은 업계를 일컫는 'IMF 특수', IMF를 타지 않는 계층과 정치권, 강남 일대 룸살롱을 지칭한 'IMF무풍지대' 등 시대상을 대변해 주는 다양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로부터 9년 후. 한국 경제는 경기 회복과 부진 사이를 오가면서 발전해왔다. 그 결과 당시 -6.7%까지 곤두박질쳤던 경제성장률을 올해 4.5%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아직 충격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났지 못했지만 이는 북핵 사태 등 돌발 상황에서도 지난해와 큰 차이 없이 성장을 이끈 수치이다.
또 IMF를 상징하던 '고금리 시대'에서도 벗어났다. 시장금리는 1997년 13.14%, 1998년 14.90%로 극에 달했다가 꾸준히 낮아져 지난해 3.32%, 올해에는 4.5%까지 낮아진 상태다. 9년새 금리가 5분의 1수준으로 떨어진 셈이다.
정기예금 금리도 덩달아 떨어져 그야말로 '저금리 시대'를 맞고 있다. 지난 1998년 연 13.39%로 정점을 찍고는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 지난해에는 3.57%를 기록했다.
또 여성 취업자 수도 크게 늘었다. 경기가 악화되면서 직장에서 쫓겨난 가장을 대신해 여성 인력이 시장에 대거 투입됐기 때문이다.
1997년 873만명에 달했던 여성 취업자는 2001년 899만명으로 900만명에 근접한 이래로 2002년 922만명, 2003년 910만명, 2004년 936만, 2005년 952만명으로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편 당시 가슴 아픈 마음으로 내쫓았던 직원들을 다시 회사로 불러들일 만큼 우리 기업도 성장했다. 최근 하나은행은 IMF 당시 금융권을 떠났던 여성 직원을 우대하는 '특별 공개채용'을 실시했다.
2001년 GM의 대우차 인수 당시 1725명을 해고했던 GM대우 역시 "경영 실적이 좋아지면 우선적으로 채용하겠다"고 약속한 바를 지켜, 지난 2002년 말부터 재고용을 시작해 지난 5월까지 해고했던 전 직원에 대해 본인이 원할 경우 전원 복직시켰다.
대우건설도 회사가 정상화되면서 떠났던 직원 300여명을 재임용 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제 재기 불능으로 여겨지던 부실기업들이 잇달아 워크아웃의 아픈 기억을 털어내고, 우량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워크아웃기업으로 분류돼 채권단 관리를 받았던 대우전자(현 대우일렉서비스)는 현재 세탁기나 TV부문은 폴란드, 베트남 등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1·4분기에는 세계 TV시장 점유율에서 7위에 올라 워크아웃 이후 최초로 세계 톱10 안에 진입했다.
이는 국내영업과 서비스 부문으로 분리하고, 2002년 11월 회사 이름을 현재의 대우일렉트로닉스로 변경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대우일렉은 회사 매각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쎄' 김치냉장고 등 신제품 개발에 만전을 기했다.
대우건설은 그룹에서 독립한 지 6년 만에 그리고 지난 2003년 워크아웃의 꼬리표를 뗀지 불과 3년 만에 올해 '시공능력평가 1위'에 올랐다. 3년간 임금동결, 상여금 400% 삭감, 복리후생비지원 중지라는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 결과, 지난해에 4000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대우건설 관계자는 "그룹해체로 도산위기에 몰렸던 1999년 '한마음 다지기 결의대회'까지 열며 대우건설 회생을 위해 발 벗고 나섰던 협력 업체들의 노력과 도움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쌍용건설도 힘찬 발걸음을 하고 있다. 쌍용자동차를 대우자동차에 매각하면서 떠 안은 부채 1,600억원과 IMF 외환위기 당시 발생한 미수금 3,700억원으로 현금 유동성이 악화돼, 99년 3월 2일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그러나 2,300명에 달하던 직원 수는 800명으로 줄이고, 보유자산은 가차없이 매각하는 등 철저한 내핍 경영에 들어갔다.
그 결과 2003년 말 5년 연속 적자를 보이던 경상이익이 워크아웃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흑자 전환해 2004년 10월 그렇게도 기다리던 워크아웃 졸업을 5년 7개월 만에 맞이했다.
하이닉스반도체도 당초 2006년 12월 31일로 예정돼 있던 워크아웃 졸업 날짜를 1년 6개월 가량 앞당겨 지난해 7월 조기 졸업했다. 외환위기 직후 최대 애물단지로 외국기업에 매각될 위기에 처했던 하이닉스반도체가 연간 순익만도 조 단위가 넘는 알짜기업이 된 것이다.
그간 비메모리사업부문 매각 등을 통해 부채비율이 2000년말 2백21%에서 2004년말 48%로 낮아지는 등 재무구조가 현저히 개선됐고, ST마이크로와의 중국 생산공장 합작투자, 낸드플래시 사업 진출 등으로 중장기 생존기반을 구축하는 등 사업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것이 조기 졸업의 배경이 됐다.
현대그룹 유동성 위기로 2001년부터 은행을 중심으로 채권단 공동관리를 받은 현대건설도 올해 봄 워크아웃에서 졸업, 매각 작업을 진행 중이다.
현대건설은 워크아웃에 들어가기 직전인 2000년말 자기자본 마이너스 8572억원에, 차입금이 4조4832억원에 달했으나 지난해 말 현재 자기자본 1조3156억원, 당기순이익 3265억원, 차입금 1조7318억원의 우량한 회사로 탈바꿈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철저한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펴는 한편 대규모 구조정을 단행, 7000여명이던 직원수가 5년 만에 절반수준으로 줄어드는 아픔이 수반된 결과였다.
그러나 IMF의 잔재 청산이라 할 수 있는 기업들의 '워크아웃 졸업'이라는 기쁜 소식에도 정작 서민들은 경기 회복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경제가 여전히 IFM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IMF 이후 새로운 일자리를 찾다가 생계형 창업에 뛰어든 이들로 인해 경쟁이 심화된 데다가 소비심리가 위축돼 있어, 여전히 건설, 도소매, 음식 숙박업에서는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실업률의 경우, 1997년 2.3%에서 98년 7.2%로 실업자수만 157만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2002년 2.5%까지 낮아지는 듯 보이다가 2003년이래 3.5%, 2005년 4.0% 로 다시 높아지고 있다. 아직까지 IMF 이전보다 실업률을 낮추지 못한 실정이다.
또 부채 규모도 급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가계신용은 1999년 21만4036억원, 2000년 26만6898억원, 2001년 34만1673억원, 2002년 43만9059억원, 2005년 52만1495억원, 올 3·4분기에는 55만8,817억원까지 증가, 9년새 무려 2배이상 부채가 늘어났다.
가계신용은 주택담보대출, 마이너스통장 대출 등 일반 가계대출에 신용카드 사용금액을 포함한 가장 넓은 의미의 가계부채 지표이다.
여기에 가계 소득에 대비한 금융비용의 증가에 따라서 가계부채가 올해 600조 원을 넘어선 가운데 해가 갈수록 개인파산자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지난 4월부터는 월별 파산 신청자가 1만 명을 웃돌아 이대로라면 올 연말까지 신청자가 사상 처음으로 1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은 빚을 갚지 못해 사실상 파산상태지만 아직 파산신청을 하지 않은 잠재적 개인 파산자만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IMF는 사회 전반에 보이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지나갔다. 경제 위기와 동시에 시련을 겪은 국민들은 '재테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이런 '재테크' 열풍은 IMF 이후 베스트 셀러 상위권에 줄곧 자기 계발과 재테크 관련 서적이 올려놨다.
이에 출판업계의 불황 속에서도 '한국의 젊은 부자들' '한국의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등 재테크 서적은 높은 판매율을 기록했다.
정민경 YES24 경제분야 담당자는 "주식, 부동산, 창업 분야 책이 최근 경기 흐름에 따라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구매자 중 20대가 32%를 차지하는 등 점차 연령과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독자층을 상대로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 자식들에게도 어린 나이부터 경제 개념과 마인드를 가르치기 위해 어린이용 재테크, 경제 서적이 줄줄이 출시되고, 어린이 대상 금융 상품의 출시도 크게 늘었다.
사이버 상에서도 '부자 되기' 열풍이 불어 관련 카페의 개설이 급증했다. 이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는 "경제를 일찍 알수록 성공도 일찍 찾아온다"는 믿음이다.
얼마 전 '20대 부자되기' 온라인 클럽에 가입했다는 신상욱(동국대 4)씨는 "좀 더 일찍 돈과 경제에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이 오히려 아쉽다"며 "동호회를 통해 주식공부를 하고 회원들끼리 각종정보를 공유하는 일들이 자신을 경제적인 미숙아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한편 IMF로 가장 격변을 치른 금융권은 상시 구조조정 체제로 바뀌면서 일주일에 3~4번씩 있던 술자리 문화도 없어졌고, 힘들어하는 동료가 보여도 감히 '술 한 잔하자'고 말을 떼지 못하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IMF 당시 첫 직장에 입사한 김 모씨(38)는 "입사하자마자 40~50대 대선배들이 줄줄이 정리해고 당하는 것을 보면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위기감이 더욱 커졌다"면서 "불필요한 술자리를 갖기보다 영어공부며, 각종 자격증 취득 등 자기계발을 하려는 노력이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고용 형태도 크게 달라졌다. 명예퇴직은 연례행사처럼 이뤄졌으며, 비정규직도 급증했다. 인건비가 높은 정규직을 줄이고 그 자리에 비정규직을 채워 넣은 것이다. 실제로 임시·일용직 취업자는 크게 증가해 1998년 29%달했던 전체 취업자중 임시·일용직의 비중은 이후 1999년 32.7%으로 상승했다.
특히 금융권의 경우, 기존의 콜센터나 총무 업무 외에도 창구 및 대출·외환 업무 등 전문 영역까지 비정규직 고용이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갈등, 차등 대우 등으로 인해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업체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원들은 분리돼 있으며, 동일한 노동을 하더라도 임금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달리 상여금이 없고, 학자금이나 주택자금 지원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최장집 교수(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는 "IMF 구제금융 이후 고용불안, 실업, 중산층의 붕괴, 빈부격차 확대 등이 나타났다"면서 "짧은 시간 안에 생산체제, 재벌기업 구조조정, 금융 시장구조, 공기업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조건에 맞추려다 보니 실업이나 고용 불안 등이 한꺼번에 닥쳤다"고 말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IMF가 우리 사회에 준 상처는 너무 깊어 아직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노력을 통해 워크아웃을 졸업한 기업들의 사례를 미뤄보더라도 지금의 국내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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