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유상석 기자] 재벌 2ㆍ3세들이 나란히 법정에 섰다. 국회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정당한 사유 없이 불출석 한 재벌 오너들에 대해 법원이 엄중한 책임을 묻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금까진 국회 불출석을 이유로 검찰에 고발되더라도 벌금형의 약식명령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법원은 최근 국회에서의 증언ㆍ감정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재벌 2ㆍ3세 4명을 직접 심리하기 위해 직권으로 정식재판에 회부했다. 이처럼 법원이 재벌 총수들에게 잇따라 실형을 선고한 것은 한층 강해진 양형기준에 따라 엄벌을 내리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법원은 가장 먼저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에게 벌금 최고액인 1500만원을 선고했다. 국회 출석 요구에 세 차례나 불응한 혐의에 대해 경합범 가중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검찰 구형보다도 높은 형이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에게는 각 벌금 1000만원이 선고됐다. 아직 선고공판을 받지 않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검찰로부터 벌금 500만원을 구형받았다.
법원은 재벌에게 “벌금 1000만~1500만원이 큰 액수는 아니겠지만, 재범을 저지를 경우 엄중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 부회장의 심리를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8단독 소병석 판사는 “비록 벌금형으로 가볍게 끝날까봐 우려가 되는 면이 있지만 같은 범행이 반복될 경우 집행유예를, 또 반복될 경우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재벌 오너의 사회적ㆍ법률적 의무 이행에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점을 명심하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법정에 나온 재벌 2, 3세들은 하나같이 “앞으로 국회 출석 요구에 성실히 임하겠다. 충실히 본연의 업무를 다하겠다.”고 선처를 호소했다.
◇ “재벌=솜방망이 처벌” 공식 깨지나
그간 재벌 총수들은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도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재벌 총수에 대한 판결에는 항상 ‘솜방망이 처벌 아니냐’는 사회적 비난이 뒤따랐다.
불과 5년 전인 지난 2008년, 비자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만 해도 1100억원의 탈세 혐의 등이 유죄로 인정됐지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이듬해 말에는 특별사면으로 면죄부를 받았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도 2006년 700억 원의 회사 돈 횡령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5년으로 풀려났다. 몇 개월 뒤에는 아예 특별 사면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2008년 1조5000억원대의 분식회계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최 회장도 마찬가지로 특별사면을 받았다. 마치 “재벌총수=집행유예=특별사면”이라는 공식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수천억원의 회사 돈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지난해 1월 다시 기소된 최 회장은 이번만큼은 집행유예 공식에서 비껴갔다. “범행에 전혀 가담한 적이 없다”며 혐의를 일관되게 부인해 왔지만 1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오히려 사건의 주범이라고 주장했던 최 회장의 동생 최재원 부회장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당시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 재판장이던 이원범 부장판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선도하며 국민기업으로 성장한 SK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은 참으로 심대하다”며 “재판과정에서 책임의 무거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진실 되게 보여주지 못했고, 오히려 공범으로 기소된 다른 공동 피고인들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전가하는 변명으로 일관했다”고 실형 이유를 설명했다.
◇ 재벌 총수 처벌 분위기 달라져
이렇듯 재벌 총수들에 대한 법원의 처벌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경우 재벌 총수들에 대한 기존의 처벌 공식을 깼다. 회사와 주주들에게 수천억원대의 손해를 입힌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김 회장이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선고받게 된 것이다.
그간 법원은 재벌 총수들이 경제발전에 기여한 점을 주요한 감형 이유로 삼고 집행유예를 선고해왔다. 그러나 최근 법원의 처벌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은 한층 강해진 양형기준에 따라 엄벌을 내리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지난해 경제 범죄에 대한 대법원 양형기준안에 따르면 횡령ㆍ배임 이득액이 ‘50억원 이상 300억원 미만’인 경우 기본 4~7년, 가중 5~8년, 감경 2년6월~5년으로 정하고 있다. 이득액이 300억원 이상인 경우 기본 5~8년, 가중 7~11년, 감경 4~7년을 처벌할 수 있다.
한편 경제 범죄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을 강화하는 분위기는 정치권에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법사위원회에 계류 중인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과 기업범죄의 사면을 제한하는 사면법 개정안 등이 어떻게 처리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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