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칼럼] 무죄추정의 원칙과 '강호동' 회장이 남긴 교훈

이덕형 기자 / 기사승인 : 2025-10-25 09: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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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중앙회 강호동 회장을 향한 여론 재판은 없어야

 

▲이덕형 편집국장
[토요경제 = 이덕형 기자] 국정감사장 한복판에서 “돈을 받았으면 왜 고맙단 얘기를 안 하냐”는 녹취가 공개됐다. 그 대상이 농협중앙회 강호동 회장이었다. 여야 의원들의 질의가 이어졌고, 경찰은 곧바로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녹취 속 대화, 용역업체의 진술, 입찰 취소 정황까지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그날 이후 ‘1억 원 뇌물’이라는 자극적 문장이 인터넷을 뒤덮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하나가 가려졌다. 이 사건은 아직 확정된 범죄가 아니다.수사가 진행 중인 의혹이며, 당사자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언론과 온라인 공간에서는 이미 ‘유죄 확정’의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제27조 4항)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여론 재판이다. 언론의 본질은 ‘의혹 제기’가 아니라 ‘사실 확인’이다.

국감장에서 나온 발언은 정치적 발언일 뿐, 수사기관의 판단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를 단정적으로 보도하거나 제목에 “뇌물 받았다”는 식으로 명시하면,언론은 ‘사실 전달자’가 아니라 ‘심판자’가 된다. 이 한 줄의 차이가 한 사람의 명예를 무너뜨리고, 사회적 신뢰를 붕괴시킨다. 

 

무죄추정은 범죄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국민 모두가 국가권력 앞에서 공정하게 대우받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다. 증거와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죄인이라 부를 수 없다. 이 원칙은 형사소송법의 문장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사회가 유지되는 근본 질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이 원칙을 잊는다.뉴스 속 피의자를 사회가 먼저 ‘범인’으로 호명하고, 그 결과가 뒤집혀도 돌이킬 수 없는 손해가 남는다. 언론의 책임은 무겁다. 사실을 보도하되, 판단은 법정에 맡겨야 한다. 국감장에서 공개된 녹취는 ‘참고자료’일 뿐이며, 편집된 음성이나 일부 진술만으로 진실을 단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클릭 경쟁이 법보다 앞서는 현실에서, 언론은 종종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잃는다. 보도의 자유는 사실에 대한 신중함이 전제될 때만 정당하다. 이번 사건은 농협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도덕성과 투명성 문제를 되돌아보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언론이 의혹 보도를 다룰 때 어떤 균형점을 지켜야 하는지 우리 사회 전체에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강호동 회장이 실제로 죄가 있든 없든,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수사기관이 사실을 밝히기 전에 언론이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진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법정에서 가려져야 한다. 언론의 역할은 그 과정을 감시하는 것이지, 판결을 대신 내리는 것이 아니다.


‘무죄추정’은 언론이 지켜야 할 마지막 윤리선이다. 이 선을 넘어선 순간, 우리는 진실보다 ‘의혹의 정치’를 소비하는 사회로 전락한다. 강호동 사건은 그 경계선 위에 선 우리 모두에게, 언론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지를 다시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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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 기자
이덕형 기자 1995년 방송사 기자로 입사한 뒤 사회부,정치부,경제부 등 주요부서를 두루 거쳤습니다. 앵커와 취재기자, 워싱턴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현장을 누볐고,올해로 기자 생활 31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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