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5)

김병윤 기자 / 기사승인 : 2022-01-18 17: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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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남대문), 숙정문(肅靖門·북문)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서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큰 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광희문(光熙門)’ 

▲남대문 사진 : 김병윤 대기자
숭례문은 국보 1호이다. 1962년에 지정했다. 남대문이 더 친근하다. 1395년에 짓기 시작해 1398년에 완성됐다. 현판이 특이하다. 세로로 걸려있다.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 세로로 걸었다.

숭례문 앞에 연못도 만들었다. 지금은 없어졌다. 모두가 경복궁의 화재를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것이다. 숭례문은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남쪽으로 가는 통로였다. 전국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문이 크다. 말 탄 사람이 주로 다녔다. 양반이 많이 사용했다. 평민은 숭례문 통과를 꺼렸다. 검문이 심했다. 양반의 꼴도 보기 싫었다. 옆 쪽문으로 왕래했다. 숭례문은 조선 최대의 관문이었다. 숭례문은 외로웠다. 자동차들이 에워싸고 돌았다.
▲1963년경 남대문전경 사진 : 서울사진아카이브 제공

풍수지리 학자들이 말했다. 남대문이 외롭게 놓여있어 안 좋다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변화를 줬다. 남산 쪽으로 성곽을 쌓았다. 자동차 통행을 금지했다. 숭례문이 숨 쉴 통로를 만들었다.

숭례문은 큰불로 시련을 겪었다. 2008년 2월10일. 방화범에 의해 숭례문이 불탔다. 1,2층 누각이 불길에 휩싸였다.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무너졌다. 대한민국의 얼굴이 없어졌다. TV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화면에 비치는 불길을 차마 보지 못했다. 너무도 안타까워서. 너무도 분해서. 국민은 수치심에 고개를 조아렸다. 역사의 죄인이 된 심정으로 통곡했다. 한동안 사회분위기가 어두웠다. 숭례문은 우리에게 그처럼 귀한 존재다. 정신적 지주다. 마음의 고향이다.

숭례문은 국민의 성원아래 옛 모습을 되찾았다. 대대적으로 수리를 했다. 해방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수리였다. 복구는 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한 번 깨어진 유리병은 붙지 않는다. 붙는다 해도 옛 모습은 아니다. 숭례문의 빛바랜 기둥이 그리워진다. 세월을 머금은 기왓장이 보고 싶다. 성곽의 검은 돌이 눈에 아른거린다.

광희문은 숭례문의 자문이다. 고통의 역사를 갖고 있다. 임진왜란, 6.25때 파괴됐다. 병자호란 때는 임금이 광희문을 통해 피신했다.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했다. 시신이 나간다는 뜻이다. 도성의 시신은 광희문을 통해 나갔다. 동쪽으로 나가는 장례행렬이었다. 서쪽 장례행렬은 서소문을 통과했다.

광희문 주변에는 옛날부터 상권이 발달했다. 특히 식당이 번창했다. 장례행렬 때문이다. 장례행렬이 지나가면 사람이 모였다. 가는 사람을 보며 애틋함을 느꼈다. 나도 언젠가는 가야할 길인데. 울적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자연히 술이 따랐다. 안주도 풍부했다. 마장동 도축장이 가까워 싱싱한 고기가 나왔다. 뚝섬 채소밭이 바로 옆 동네다. 파릇파릇한 채소도 많았다. 푸짐한 고기와 채소가 술 맛을 거들었다. 광희문 부근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술 취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널리 퍼졌다. 삶에 찌든 여인네의 눈물도 땅을 적셨다. 광희문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갔다. 백성의 모든 애환을 가슴에 담은 채.

숱한 고통 속에서 묵묵히 버텨낸 ‘숙정문(肅靖門·북문) 창의문(彰義門)’ 

▲창의문 풍경 사진 : 김병윤 대기자

숙정문은 서울의 북문이다.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오상이 안 들어갔다. 원래는 가운데에 지(智) 자가 들어가야 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지자가 빠졌다. 북쪽과 지자의 궁합이 안 맞았나 보다. 숙정문으로 지어졌다. 그렇다고 숙지문이 숙정문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숙정문은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었다. 산 위에 세워져서다. 북악산에 자리 잡았다. 산세가 매우 험난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인들이 바람이 난다고 했다. 문을 만들고 100일만 열어 놨다. 폐쇄된 채 자리를 지켰다. 대문의 구실을 제대로 못 했다. 숙정문 대신 다른 문을 세워야 했다. 백성의 편의를 위해서다. 창의문을 세웠다. 숙정문의 소문이다. 창의문은 4소문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됐다. 창의문은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자하문(紫霞門)이다.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이 더 알려져져 있다.

자하문에 대한 유래가 있다. 조선 후기 임금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임금이 북악산에서 내려올 때 자색 구름이 깔렸다고 한다.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찌 이리 아름답단 말인가. 자색 구름 멀리 창의문이 눈에 들어왔다. “자색 구름 멀리문이 있으니 자하문이 어떠한가”. 창의문이 자하문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정설은 아니다. 그럴 듯하다.

한국의 구름을 자세히 보라. 자색 파스텔 색깔이 난다. 하늘을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창의문은 실질적으로 북문 역할을 했다. 4소문 중에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다행이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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