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18)

김병윤 기자 / 기사승인 : 2022-03-04 23: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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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본·중국문화의 혼합 ‘다방’,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한국·일본·중국문화의 혼합 ‘다방’ 

▲1983년 마포구에서 개최한 새마을자선다방 행사의 모습 사진 : 서울사진아카이브 제공
다방은 언제 생겼을까. 구한말 때 생겼다. 한국·일본·중국의 혼합문화다. 새로운 대중문화의 탄생이다. 조선시대에는 접하지 못 했던 신문물이었다. 신문화로 가는 과정이었다. 신문화는 복잡하다. 여러 가지 요소가 혼합된다.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이다. 한국의 신문화는 더 복잡하다. 전통문화에 일본의 신문화가 겹쳐졌다. 엄밀히 말하면 뜻이 다르다. 일본을 거쳐 온 서양문화다. 중국도 우리 대중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 생긴 것이 다방이다.

다방문화는 어땠을까. 우선은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다방이 도입된 시기의 사회상은 이랬다.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다. 토론의 장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생활상을 알기가 힘들었다. 새 지식을 얻을 방법이 부족했다. 이웃사람이 전해주는 소식을 들었다. 신문을 통해서 보기도 했다. 신문마저도 귀한 시절이었다. 대중은 정보획득에 목말랐다. 다방은 이런 욕구를 채워줬다. 만남의 장소를 제공했다. 정보를 교환하게 해줬고 새 지식을 얻게 했다. 대중의 갈증을 해소해 줬다.

다방은 점차 발전하게 된다. 단순한 모임의 장소에서 벗어났다. 비즈니스화 됐다. 사무실 역할을 했다. 사무실이 없던 시절 얘기다. 모든 업무가 다방에서 이뤄졌다. 출근을 다방으로 했다. 퇴근 역시 다방이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업무를 봤다. 하루 종일 다방에서 살았다. 다방은 곧 사무실이었다.

다방은 결혼 문화에도 큰 역할을 했다. 중매를 다방에서 했다. 선남선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쪽저쪽이 시끄러웠다. 중매쟁이들의 목소리였다. 처녀들의 수줍은 미소가 어둠속에 빛났다. 중매의 명소로 꼽힌 다방도 있었다. 성사가 잘 된다고 소문난 다방이었다.다방은 점차 고객의 다양화를 이뤘다.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손님이 장년층에서 청년층으로 확대됐다.

다방의 운영방식도 변했다. 학생의 취향에 맞췄다. DJ박스를 설치해 음악을 틀어 줬다. 옛 노래가 아니다. 팝송을 들려줬다. 시너지 효과가 났다.학생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팝송을 듣기위해. 새로운 직업도 생겨났다. 다방 DJ다. 디스크자키의 약자다. DJ 인기에 따라 매출차이가 크게 났다. 훗날 한국 음악방송 진행자의 거물들이 나왔다. 최동욱. 이종환, 박원웅이다. 이들 모두가 다방 DJ 출신이다. 젊은이의 꿈이었다. 월급은 없었다. 팁을 받았다. 곡을 신청할 때 전달했다. 곡 신청은 메모지로 했다. DJ와 손님들 간의 로맨스도 있었다. DJ를 보기위해 오는 손님도 있었다.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대부분 여성 손님이었다.

다방 종사자 간에는 규율이 엄격했다. 마담과 레지가 있었다. 마담은 지금의 매니저역할이다. 레지는 원래 돈 받는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커피와 차를 날랐다. 마담은 한복을 입었다. 손님 옆에 앉아 차를 같이 마셨다. 매상을 올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고객유치의 방법이기도 했다. 레지는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마담과 차이가 있다. 손님옆에 앉지 못 했다. 다방의 성공은 마담과 레지의 영향이 컸다. 마담과 레지는 이동이 잦았다. 스카우트 경쟁이 심했다. 인기인 못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장사는 종업원이 한다는 게.

다방에는 필수품목이 있었다. 통 성냥이다. 커다란 통에 성냥이 가득 차있다. 지금은 보기 힘들다. 있긴 하다. 손님을 기다릴 때 꼭 필요했다. 성냥개비로 탑을 쌓았다. 쌓다가 무너지면 또 쌓았다. 무료함을 달래줬다. 종업원과 다툼도 있었다. 성냥을 부러뜨릴 때다. 종업원이 싫은 말을 했다. 그만 부러 뜨리라고. 이상한 손님이 있었다. 유독 성냥을 부러뜨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제는 그 모습마저 그리워진다.

다방에서는 여러 종류의 차를 팔았다. 커피. 홍차, 위스키 티, 쌍화차 등등 다양했다. 한국에서 만든 커피도 있었다. 콩피였다. 낯 설을 것이다. 프랑스 음식같은 느낌일 게다. 아니다. 콩을 갈아 맛을 낸 커피다. 순수 한국산이다.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커피가 귀하던 시절 이야기다. 추억의 맛이다.

1970년대에 새로운 커피가 도입됐다. 비엔나와 아메리카노이다. 비엔나커피가 먼저 들어왔다. 위스키를 타 마셨다. 커피 중에 유일하게 위스키를 타 마실 수 있다. 크게 유행했다. 위티도 있었다. 홍차에 위스키를 탔다. 도리스(DORIS) 위스키였다.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나중에 도라지 위스키로 바뀌었다.

달걀 반숙도 인기였다. 달걀 반숙에는 씁쓸한 사연도 있다. 돈 없는 사람들의 사연이다. 커피 시킬 돈이 없었다. 자리 값은 해야 했다. 배도 고팠다. 점심 겸 해서 시켰다. 달걀마저 귀하던 시절이었다. 의외로 달걀반숙을 많이 시켜 먹었다. 그 시절의 생활상이다.

웃지 못 할 일화도 많았다. 홍차를 마실 때 생기던 일이었다. 홍차 티백의 사용법을 몰랐다. 티백을 찢어 내용물을 물에 넣어 마셨다. 커피를 마실 때도 촌극이 벌어졌다. 모닝커피도 팔았다. 아침에 주로 팔았다. 커피에 달걀노른자를 띄워 줬다. 노른자를 안 넣으면 큰소리가 났다. 나는 왜 모닝을 안 주냐고. 노른자를 모닝이라 알았던 거다.

다방에 종종 경찰이 출동했다. 풍기문란 신고를 받아서다, 다방은 대체로 어둠침침했다. 남녀들이 자주 찾았다. 나이에 상관이 없었다. 쌍쌍이 온 손님은 주로 구석진 곳에 앉았다. 마주보고 앉지 않았다. 옆에 바짝 붙었다. 시간이 흐르면 점점 가까워 졌다. 끝내 키스를 하고는 했다. 다른 손님이 가만있지 않았다. 종업원도 일부 그랬다. 경찰에 신고를 했다. 풍기문란이라고. 대부분이 훈방조치를 받았다. 종종 벌금형을 받기도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눈 좀 감아주지.

다방은 서울과 부산에서 시작됐다. 서울에는 큰 다방들이 생겨났다. 주로 명동에서 번창했다. 명동에 비너스 다방이 있었다. 영화배우 복혜숙 씨가 운영했다. 종로1가에 제비 다방이 있었다. 천재시인 이상이 주인이었다. 두 다방은 손님으로 북적댔다. 지식인 문화인의 사랑방이었다. 은하수 다방도 사람이 많았다. 이름처럼 사람이 모여들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같았다. 돌체 다방도 명소였다. 나중에 음악 감상실로 전환됐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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