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지붕 없는 박물관 '군산 이야기'(3)

김병윤 기자 / 기사승인 : 2022-05-10 23: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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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동 일본식 가옥, 발산리(구)일본인 농장창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아픔과 고난의 연속이다.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일제는 36년간 우리의 삼천리 금수강산을 수탈하고 농락했다. 군산은 그런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대표적인 도시다. 김병윤 대기자는 지난 100여 일 이런 아픔의 도시 군산의 이곳저곳을 돌았다. 그리고 다시 웅비하는 군산을 목도했다. 김병윤 대기자가 둘러본 ‘군산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일환으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신흥동 일본식 가옥 

▲히로쓰 가옥 사진 : 김병윤 대기자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일제강점기 생활상을 알려준다. 일본인의 부(富)를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은 평지에 살았다. 시내 중심가에 살았음을 보여준다. 당시 신흥동은 부자들이 거주했다. 자신들만의 부촌(富村)을 형성했다. 우리 국민은 시 외곽으로 빠져나가 비탈진 곳에 살았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하인으로 뒀다. 집안의 허드렛일을 시켰다. 온갖 핍박을 주면서. 우리 선조들은 수탈의 아픔과 함께 하인 생활의 고통도 겪어야 했다. 일제의 수탈은 물품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특징이 있다. 온돌이 깔려 있다. 온돌은 일본식 가옥에 어울리지 않는다. 일본인은 다다미에서 생활한다. 온돌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에는 왜 온돌이 깔렸을까. 의문이 든다. 짐작은 간다. 한반도의 추위에 적응하려 하지 않았을까. 우리 주거문화의 우수성을 배웠을 것이다. 약삭 빠른 일본인의 속성을 엿볼 수 있다. 군산에는 170여 채의 일본식 가옥이 있다. 대체로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잘 보존되어 있다. 약간의 변형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일본인 ‘히로쓰 기치 사브로’가 1935년에 건축했다. ‘히로쓰 가옥’이라 불렀다. 히로쓰 기치 사브로는 농장주, 미곡무역상을 경영한 재력가였다. 이 건물은 일본식 목조 2층 구조다. 정원이 멋스럽게 꾸며져 있다. 전통 일본식 건물이다. 원래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다. 군산에 가면 꼭 들려야 할 관광명소다. 1956년 호남제분 이용구 사장이 매입해 거주했다. 2017년엔 군산시가 사들여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관람료 없이 누구나 볼 수 있다. 다만 실내에는 들어갈 수 없다.

명심할 것이 있다. 해방과 동시에 자국으로 돌아간 일본인은 47만 명에 달한다. 일본인은 이 땅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았다.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그들이 소유했던 땅이 아직도 호남지방에 산재한다. 코로나19 발생 전에 일본인이 군산에 자주 들렀다. 단체 관광객이 아니다. 2~3명씩 소규모로 왔다 갔다. 말 없이 김제평야의 넓은 땅을 보고 돌아갔다. 그들은 누구일까. 과거 일본 농장주의 후손일 거라는 얘기가 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돌아갔을까. 섬뜩하지 아니한가. 긴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원의 아름다움에만 빠지지 마라. 선조들이 당했던 수탈의 아픔을 되새겨라. 

 

문화재 수탈의 현장 '발산리 (구) 일본인 농장창고' 

▲발산 석탑정원 정경 사진 : 김병윤 대기자
문화재 수탈의 현장이다. 값어치 있게 보존해야 한다. 문화재 수탈에 집착한 일본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악랄한 일본인. 누구일까. ‘시마타니 야소야’다. 시마타니는 군산, 익산 등지에 140여만 평 땅을 가진 농장주였다. 우리 농민에게 땅을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았다. 1933년 재해로 흉년이 들었다. 농민들은 소작료를 내기 힘들었다. 시마타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풍년 때와 똑같이 소작료를 거뒀다. 농민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시마타니는 말 그대로 악랄한 일본인이었다.
▲사마타니의 금고 사진 : 김병윤 대기자
사마타니는 문화재 수집광이었다. 자신의 농장에 36점의 석조물 문화재를 갖다 놨다. 각 농장에 분산했다. 석조물은 야외에 두었다. 매입을 빙자한 문화재 수탈이 었다. 우리의 귀한 문화재를 보관하기 위해 금고를 지었다. 땅문서와 현금도 보관했다. 금고 규모가 대단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이다. 외벽 사방은 콘크리트로 요새처럼 지었다. 교도소같이 쇠창살도 설치했다. 현재의 발산초등학교 뒤편에 있다.

그의 문화재 수집은 광적이었다. 석등, 석탑, 망주석, 도자기 등 가릴 것이 없었다.‘발산리 석등과 5층 석탑’ 등 중요 문화재를 불법으로 수집했다. 발산리 5층 석탑과 석등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시마타니는 수탈한 문화재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집념이 대단했다. 시마타니가(家) 후손들을 한국인으로 귀화시켰다. 그들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우리문화재에 집착한 시마타니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물거품이 됐다. 미군정이 일본인 재산 반출을 막았다. 미군정은 귀국하는 일본인에게 엄명을 내렸다. 1인당 1000엔 이상 반출금지. 보따리 2개로 제한했다. 시마타니는 수많은 재산을 놓고 가야만 했다. 시마타니는 결국 손가방 2개만 들고 황급히 떠났다.

그토록 집착했던 한국의 문화재를 놓고 발길을 재촉했다. 부산항에서 귀국선을 탔다. 일본으로 돌아갔다. 넘실대는 파도에 서러움의 눈물을 뿌리며. 하늘이 그에게 내린 벌이었다. 인과응보의 당연한 결과였다. 시마타니는 뉘우쳤을까. 자신의 악행을. 자신의 재산이 한국인의 피와 땀을 쥐어짜 이뤄졌다는 것을. 아마도 못 느꼈으리라. 단지 남겨놓은 재산에 분통을 터뜨렸을 듯하다.

시마타니의 광활한 토지와 문화재는 국가에 귀속됐다. 일본으로 반출될 문화재가 우리 땅에 남게 됐다. 금고에 있던 문화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했다. 석조물은 발산초등학교 뒤편에 모았다. 전라북도가 2001년 정비작업을 했다. 석등, 석탑 등을 한자리에 모았다. 석탑은 원래부터 지금의 자리에 있었다.

석조물을 발산초등학교에 모은 사연이 있다. 광복 후 학교를 세우려니 적당한 부지가 없었다. 고민 끝에 생각한 곳이 일본인 소유의 농장이었다. 저택과 사무실, 창고, 벼 건조장이 갖춰진 곳을 찾았다. 시마타니의 농장이다.

현재의 발산초등학교 자리다. 1947년 ‘개정초등학교’ 분교로 설립됐다. 1984년 발산국민학교로 승격됐다. 벼 건조장이 현재의 운동장이다. 창고 자리에는 교실이 들어섰다. 현재 금고 옆에 시마타니 저택이 있었다. 시마타니는 약탈한 보물을 정원의 조형물로 사용했다. 전라북도는 시마타니의 욕심이 담긴 자리에 다른 문화재를 함께 모았다.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시마타니의 삶을 보며 교훈을 얻는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 집착은 어리석은 자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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