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4년 12월 북한 개성공단에 첫 기업 입주가 시작되면서 국내 시중은행 가운데서도 북한 진출 1호 지점인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이 개점했고, 이는 남북경제 협력의 초석을 다지는 사례로 기록됐다.
그러나 북측이 지난해 9월 북측 법인인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명의로 차명 계좌 개설을 요청하고, 이에 앞서 우리은행이 이미 4개의 계좌를 개설해 준 사실이 최근에 공개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지난 3월 우리은행은 통일부에 공문을 보내, 2004년 12월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명의로 4개의 계좌를 개설한 것이 문제가 없는지에 대한 검토를 요청한 것이 최근에 공개됐다. 우리은행 개성지점의 사업 승인 범위는 '개성공단 입주기업과 개인(남측 종업원)'으로 한정돼 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관리위원회가 북한법인인 데다 북측 인원이 근무하는 것이 파악돼, 문제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통일부에 문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통일부는 지난 3월 28일 "관리위원회는 우리측 인원들로 구성된 기관으로 계좌 개설은 협력사업 승인 범위 내 행위"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우리은행측에 전달했다.
통일부 개성공단사업지원단 지원총괄팀 마경조 사무관은 당시 상황을 "이미 한 차례 북한측의 계좌 개설 요청과 거절 건이 있고 난 뒤라 우리은행이 승인 범위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다"면서 "때문에 통일부에 요청이 들어오자 통일부가 이를 정리를 해준 것 뿐 인데 왜 이렇게 문제가 공론화 됐는지 모르겠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관리위원회는 엄연히 북측 개성공업지구법에 따라 설립된 북측기관인 데다가 입주기업도 아니다. 또 통일부의 설명과 달리 관리위원회에는 김동근 위원장을 포함한 40여명의 남측 인원과 더불어 협력부에 북측 인원 5명이 지난해 11월부터 함께 근무하고 있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지난 22일 기자회견에서 "개성공업지구관리위의 계좌 개설에 대해 통일부가 취한 입장에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면서 "위원회와 공단기업은 법률적·형식적 측면에선 북측이지만 우리 쪽 사람들이 관리하고, 우리 기업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이므로 당연히 계좌를 설치해 준 것"이라고 말했다.
관리위측 역시 "개설된 계좌도 남쪽 직원의 임금과 예산집행에 사용됐고 북측과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북측은 지난해 9월 또 한 차례 관리위원회 명의로 차명 계좌 개설을 요구해, 현재 관리위 계좌에 대한 남측의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북측의 계좌 개설 요청의 목적 및 이용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다.
또 애당초 우리은행의 승인 범위를 '입주기업과 개인'으로 한정했던 통일부가 이제 와서 '폭넓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런 지적은 통일부가 관계부처의 반대에도 올 3월까지 북한 특구개발총국 명의의 계좌 개설을 추진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북측 기관인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이 관리위원회를 통해 우리은행 개성지점에 계좌 개설을 구두로 요청했으나 특구개발총국이 명백히 북한 당국에 해당하기 때문에 우리은행은 이를 거절했다.
당시 우리은행측은 "승인 업무 범위가 개성공단 입주 기업과 남측 종업원으로 한정돼 있어 현재로선 북측의 계좌 개설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북측은 우리은행에 또 한 차례 공문을 통해 의견을 보내왔다.
양창석 통일부 대변인은 "북측이 한때 관리위원회에 은행지점을 폐쇄하겠다며 협박을 하기도 했지만 지난 3월 계좌개설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우리측(통일부)에 전달하면서 일단락 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이 우리은행으로부터 입수해 공개한 3월 7일 관계부처 대책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통일부는 관계부처의 반대를 무릎 쓰더라도 특구개발총국 명의의 계좌를 만들어 주려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자리에서 통일부는 "공단사업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북한계좌 개설문제로 난관에 직면했다"면서 "이를 돌파하기 위해 우리은행의 협력사업의 범위를 조정하고, 미국에 대한 자금흐름 투명성 설명으로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니 은행이 현명한 결정을 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이에 우리은행측은 "개성공단 입주기업 및 인원에 대한 금융서비스로 규정된 협력사업의 범위에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게 원칙"이라면서 "미국 재무부의 반 테리법,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A) 문제없이 북한 계좌를 개설하는 건 수용하기 어렵다"고 밝혔고, 재경부는 "북측의 진의를 모르면서 이를 수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외교통상부는 "6자회담 등 미국 및 북한과 관계된 외교 과제가 산적한 점을 감안해 미국을 자극할 여지가 있는 금융관련 사업은 추진하지 않은 것이 좋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는 북한 계좌를 요청한 시점이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 동결 하루 전날 인 점을 감안해 관련부처들은 혹시나 모를 북의 의도에 반대를 했던 것. 사실 북한이 새로운 자본 활로로 남측 계좌를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실제로 당시 중앙특구총국이 계좌 개설을 위해 내세운 명목은 '공단 내 남측 근로자의 소득세 징수와 북측 근로자 임금 수금 편의'였지만 소득세를 내야 하는 남측 근로자는 100명이 채 되지 않으며, 소득세가 분기당 5만 달러, 임금이 연간 1,200만 달러 정도 규모라 북한 당국이 크게 불편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통일부는 승인 규정을 고쳐가면서까지 북한의 요구대로 계좌를 개설해 주려했으며, 같은 달 28일에도 관리위 계좌 개설 검토 공문을 우리은행에 다시 보내는 등 통일부의 노력이 계속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관은 이에 "당시 금융제재가 일반화되기 전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재무부 금융범죄단속반이 올 1월 23일 방한해 정부 관계자들에게 북한의 위조지폐 유통 실태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북한과 우리은행이 금융거래를 할 경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고, 이 장관이 2월 취임 직후부터 북한 위폐와 개성공단 달러 지급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만큼 사태의 심각성을 모를 리 없었다.
결국 여전히 북측의 요구대로 '끌어다니기 식' 대북 관계가 개성공단사업에서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개성공단에 진출한 국내기업들이 공단에 세운 북측 법인에 임금 등을 송금하는 과정에서 불법성이 드러나 정부의 개성공단 돈줄 관리에 구멍이 뚫렸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외국환 거래 규정에 따르면 북한과의 교역은 해외 거래로 분류돼 일정 금액 이상을 북한지역에 송금할 때는 한국은행에 신고해야 하지만 신고절차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입주 기업들이 신고하지 않았다.
지난 6월 뒤늦게야 재경부가 이 사실을 알고 외국환관리지침에 특례 규정을 넣어 한국은행 신고를 면제하는 방식으로 합법화했다. 그러나 2005년부터 올 3월까지 북측으로 편법 송금된 금액은 230만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장관은 "개성공단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법률적으로 북한 기업이라는 점을 간과해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서 "그러나 송금액은 모두 한국 기업들에 전달됐으며 현재는 관련 지침을 개정해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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