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아버지가 낳으시고 스승이 가르쳐주시고 임금이 먹여주어 산다.(<國語>晉語)
진 왕조가 곡옥 군주에게 점령당했을 때 마지막 후계자가 투항권고를 거부하며 한 말
그 무렵 진(晉)나라에서는 분란이 일어났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우선 군주가 아이들의 이름을 지은 데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사기>의 기록도 그러하다.
진나라 군주 목후(穆侯)가 제나라 여자 강씨(姜氏)를 부인으로 맞아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구(仇)라 했다. 그리고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둘째는 성사(成師)라 하였다. 한 대부가 탄식했다. “괴이하도다. 태자 이름이 원수라는 뜻이라니. 그리고 작은 아들을 성사라 하였으니 또한 괴이하다. 이 큰 이름으로 무엇을 이루라는 것인가. 이름이라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을 청하는 것이다. 지금 적자와 서자(庶子)의 이름이 반대로 되었으니 장차 진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을 예고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 이름이든 집단의 이름이든, 이름은 함부로 짓는 게 아니다. 글자에 담긴 무슨 기운 같은 것까지는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름자의 의미에는 기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무려면 자기 자식에게 ‘악마’나 ‘실패’라고 이름을 붙여주는 사람이 있겠으며, 사업의 성공을 바라면서 회사 이름을 ‘주식회사 파산’이라든가 ‘주식회사 부도’라고 짓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한 나라의 군주가 그런 일을 한 것이다. 어찌 불길하지 않겠는가.
진나라로 말하면, 주나라 초창기에 성왕의 가벼운 농담 한마디 때문에 생겨난 나라다. 성왕이 어릴 때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주공 단이 왕의 친족들을 이끌고 출동한 뒤였다. 어린 성왕은 아우 우(叔虞라 부름)와 함께 있다가 오동나무 잎을 가지고 놀면서 이를 홀 삼아 아우에게 작위 내리는 흉내를 내었다. “이것으로 너를 봉하노라.”
보고 있던 사관이 정색을 하고 성왕에게 이제 택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왕이 놀라서 “과인은 그저 농담을 했을 뿐이오.”하고 발뺌했다. 그러자 사관은 “천자께서는 함부로 농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하시면 무엇이든지 사관이 기록하고 예에 맞게 그것을 다듬은 다음 음률에 맞게 공표하여 말씀대로 실행되게 하는 것입니다.”하였다. 그래서 성왕은 깊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숙우을 제후로 봉했다. 숙우가 받은 봉토는 당(唐)이라 부르는 곳으로 옛날 요임금의 후손들이 사는 곳이다. 이로써 숙우는 당숙우가 되었다. 이쯤이면 왕의 말 한마디 문자 하나도 그 무게가 소홀할 수 없음을 숙우의 후손들은 깊이 새겨야 했다.
태자 구가 스물세살 때 목후가 죽자 삼촌인 상숙(殤叔)이 먼저 움직여 왕위를 빼앗았다. 태자 구는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가 3년 뒤에 충신들의 도움으로 상숙을 습격하여 왕권을 되찾았다. 그가 문후(文侯)다. 여기서 끝났으면 잘못지은 이름 탓은 그저 호사가들의 입방정일 뿐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뒤에 문후의 대를 이은 아들 소후(昭侯)가 작은 아버지인 성사를 곡옥(曲沃)에 봉하였다. 친척에게 보답하고 대우하려던 것이었지만 여기 또 심상치 않은 조짐이 있었다. 곡옥은 진나라의 도성인 익성(翼城)보다 규모가 컸다. 그 시절 도성의 크기는 곧 세력의 크기와 연결된다. 대신들이 또 말했다. “진나라의 환란은 장차 곡우에서 비롯될 것이다. 가지가 근본보다 더 크고 민심까지 얻었으니 어찌 난이 없기를 바라겠는가.(晉之亂其在曲沃矣 末大於本而得民心 不亂何待)”
곡옥에 부임한 성사는 이때 58세로 환숙(桓叔)으로 불리며 덕치를 베풀었으므로 민심이 그를 향했다. 그에 반해 정작 진 본국의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진나라 대신 반보가 소후를 시해하고 환숙을 불러들이려고 했다. 진나라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 방어하자 환숙은 곡옥으로 돌아갔다. 진은 반보를 주살하고 소후의 아들를 옹립하여(孝侯) 대를 잇게 했다. 하지만 오랜 잠재위협은 완전히 수면으로 드러났다. 환숙이 죽은 후 대를 이은 장백(莊伯)이 다시 쳐들어와 또 왕을 죽였다. 다시 진의 군사들이 공격하여 장백을 몰아냈다. 효후의 아들이 다시 대를 이었다. 아들 악후(愕侯)는 겨우 6년 만에 요절했다. 장백이 다시 쳐들어갔다. 주나라 평왕(平王)이 소식을 듣고 괵나라 군사들을 파견하여 진을 구했다. 장백은 곡옥을 닫아걸고 농성했다. 진이 다시 왕을 세웠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환숙이 처음 곡옥에 봉해진 이후 67년 만에 진(晉)은 결국 전국이 환숙 자손에게로 돌아갔다. 환숙의 가계에서는 환숙-장백-무공(武公)까지 3대에 걸쳐 공격을 했고, 진에서는 소후-효후-악후-애후-소자후-민후까지 6대의 군주가 희생됐다. 무공이 애후를 죽인 직후 그 자손들에게 투항을 권고했지만 그들은 거절했다.
“사람은 세 가지 은덕으로 사는 것이니 이를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고 들었소. 아버지 날 낳으시고 스승이 가르쳐주시며 임금이 먹여주어(父生之 師敎之 君食之) 사는 것이오. 그 은혜를 죽음으로 보답하는 것이 사람 된 자의 도리입니다. 혹 내가 그대를 모신다면 이미 신하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인데, 그런 사람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진후 민(緡)을 멸망시킨 후 무공이 주 천자 희왕(釐王)에게 온갖 보화와 기물을 뇌물로 바쳤다. 이전의 천자들은 제후의 의리와 법도를 위해 진왕을 보호하고 곡옥을 공격했지만, 희왕은 반란세력인 무공을 진나라 군주로 인정했다.
한 나라의 왕통이 60년 넘는 내란을 거쳐 근본에서 가지로 옮겨간 비극의 기원이 과연 100년 전 할아버지가 무심코 잘못 지은 이름에 있었을까.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행복을 잃고 싶지 않다면 불길한 언행은 삼가는 것이 좋을 일이다. 우리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지 않던가.
진(晉) 목후가 태자 이름을 구(仇)라 지었다. 후처에게서 낳은 작은아들은 성사((成師)라 지었다. “괴이하도다. 태자의 이름을 ‘원수’라 하다니, 괴이하도다. 서자에게 큰 이름을 주다니. 장차 나라가 혼란에 빠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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