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역사관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면서, 대권 행보가 주춤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5ㆍ16과 관련해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해 논란을 불러일으킨데 이어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며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또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감안하자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야당은 물론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박 후보의 대권 행보에 발목이 잡히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에 박 후보는 ‘정면 대응’을 선택했다. “인혁당 피해자 가족을 직접 찾아뵙겠다”고 나선 것이다.

◇ ‘인혁당’ 발언으로 발목 잡혔지만…
박 후보가 언급한 ‘인혁당에 대한 여러 증언’은 박범진 전 의원이 2년 전 책을 통해 밝힌 “1차 인혁당 사건은 실재한 사건이었으나, 정부당국이 (사건을) 객관화하는 데 실패해서 조작 사건처럼 계속 논란이 됐다”고 한 부분이다.
박 전 의원이 책에서 언급한 인혁당은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국가변란을 획책한 인혁당 사건을 적발, 59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지명 수배한 ‘1차 인혁당’ 사건이다.
박 후보가 언급한 “판결이 두 개”인 사건은 1974년 유신정권하에서 민청학련의 배후조종 세력으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즉 2차 인혁당 사건이다. 당시 민청학련 소속인사 1024명 중 180명이 국가보안법, 긴급조치 4호 등의 혐의로 대다수 무기징역이 선고됐고 이 중 8명에게는 사형집행이 내려졌다.
문제는 박 후보가 역사는 물론, 사법 체계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박 후보의 견해는 제쳐두더라도, 1차 인혁당과 2차 인혁당 사건을 혼동했다면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고 “판결이 두 개”라고 주장한 것이라면 형사법 체계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셈이다.
2차 인혁당 사건은 지난 2007년 재심 청구를 통해 대법원이 아닌 서울중앙지법이 인혁당 관련자 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이 항소를 포기해, 결국 최종 무죄가 확정됐다. 인혁당 사건은 재심으로 원심을 취소했기 때문에 판결은 한 개다. 박 후보의 말처럼 인혁당의 대법원 ‘판결’이 두 개가 아니라 ‘사건’이 두 개인 것.
야권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민주통합당은 박 후보를 겨냥, “편협한 역사 인식”, “무지한 칠푼이 후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김현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5ㆍ16 쿠데타가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나, 판결 18시간 만에 무고한 사람을 살인한 정권의 부당한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대통령 후보로서 아예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김 대변인은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일관된다”며 “박 후보가 이를 부인하는 한 헌법의 수호해야할 대통령 후보의 자격을 심각하게 의심받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전날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수병씨의 부인 이정숙씨가 기자회견을 통해 ‘박정희가 내 남편을 죽였고, 박근혜는 우리 자식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다’고 했다”고 전한 뒤, “박 후보는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의 절규를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유인태 민주통합당 의원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부관참시하면서 죄송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면서 “대법 판결 전 이미 (유신) 권력은 다음날 (피의자들을) 죽이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 “인혁당 피해자 만나겠다”… 정면돌파 나서
본격적인 대선 행보 후, 처음 만난 커다란 암초에 걸린 ‘박근혜號’. 정면돌파를 위해 박 후보가 나섰다. 인혁당 발언으로 논란이 커지자 “그분들(인혁당 유가족)이 동의하시면 제가 직접 찾아뵙겠다”고 말한 것.
박 후보는 인혁당 발언 논란과 관련해 당내 혼선이 빚어진데 대한 명확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는 “전부터 제가 당시에 피해 입은 분들에게 죄송하고 위로 말씀을 많이 드렸다”며 “그 연장에서 같은 얘기(입장)”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기회가 있으면 인혁당 발언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어제 차질이 있었다”며 “갑자기 그런 얘기가 나와서 어제 저녁에 제 생각을 대변인을 통해 말씀드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병수 새누리당 사무총장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 후보가 인혁당 유족을 만날 계획도 갖고 있냐’는 질문에 “고민하고 계시리라고 본다”고 언급한 바 있다.
박 후보의 정면돌파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물론 있다. 인혁당 사건 유가족을 만나겠다고 나선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향해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가 “오만방자하다”며 맹비난했다.
박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인혁당 유가족이 동의하시면 찾아뵙겠다는 말… 이 얼마나 오만방자한 말이냐”며 박 후보의 최근 발언을 문제 삼았다.
이어 “진정으로 사과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말씀을 한 후에 유족을 찾아뵙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아무런 자기반성과 역사 시각 교정 없이 만나겠다는 것은 국민과 역사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또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자격이 없다”며 “역사를 부인하고 5ㆍ16과 유신, 인혁당 사건마저 미화하고 아버지 명예회복을 꾀한다는 것은 국민과 역사가 용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누리당 비박(비 박근혜) 대표주자중 한명인 이재오 의원도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겨냥한 듯한 글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이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새벽 산행을 하고 내려오는데 오랜만에 깜이엄마를 만났다.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했더니, 돌아오는인사가 ‘거꾸로 가는 구만. 냄새가 나네’ 휭 하니 가버린, 여전하구먼…”이라고 적었다.
해당 글에서 ‘깜이엄마’는 이 의원이 설정한 가상인물로. 각종 현안에 대한 비판을 에둘러 말할 때 즐겨 사용한다.
‘거꾸로 가는 구만. 냄새가 나네. 휭 하니 가버린, 여전하구먼…’이란 구절은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박 후보의 인식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태경 의원도 “박 후보가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한 것은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을 혼동한 때문인 듯 하다”며 “박 후보는 자신의 언급이 1차 인혁당인지, 2차 인혁당인지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친박 성향 한 의원의 보좌관은 “당 안팎의 비난 또는 회의의 목소리는 이미 예상했던 바”라며 “박 후보는 진심으로 그분들을 찾아 뵙고, 목소리를 들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야당은 물론, 당 내부에서도 제기되는 회의론을 박 후보가 어떻게 타파할지에 대해 정치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커져가는 위기론, 정면돌파로…
그동안 박 후보는 각 언론사와 여론조사기관의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경쟁자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를 10%p 정도 앞서며 대세론을 굳힌 바 있다.
<MBC>가 지난 9월 10일 대선 D-100일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 후보는 안 원장과(42.2%)의 양자대결에서 49.7%를 기록, 7.5%p 앞섰다.
문 후보(37%)와의 양자대결에서는 박 후보가 52%로 무려 15%p나 앞서나갔다. 3자 대결에서도 박 후보는 45.2%의 지지율을 보이며 안 원장(27.3%)과 문 후보(16.7%)를 크게 앞질렀다.
같은 날 발표된 <한겨레>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KISO) 조사결과에서 박 후보는 안 원장과의 양자대결에서 51.3%의 지지율을 기록, 44.8%에 그친 안 원장을 6.5%p 앞섰다.
앞서 지난 9월 8일 <한국일보>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박근혜 44.6% vs 안철수 20.6% vs 문재인 13.2%’로 박 후보가 타 후보들을 압도했다.
그러나 ‘인혁당 파문’ 이후, 박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세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당 안팎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고(故) 김대중ㆍ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참배, 전태일 열사 재단 방문으로 쌓아 놓은 국민대통합 행보의 ‘공든 탑’이 사실상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또 그간 박 후보의 약점으로 지적된 2030세대와의 소통행보 역시 어려움에 처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됐다.
새누리당 내부에 위기감이 증폭되자 당 자체가 우왕좌왕하는 모양새를 보이기도 했다. 한쪽에선 파문을 진화하기 위해서 박 후보의 발언에 대해 사과를 하고 다른 쪽에선 “사과를 한 적이 없다”고 반박하는 촌극이 빚어진 것.
홍일표 대변인은 “박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 소지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면서 “박 후보도 유신체제의 그늘에 있었고 당시 민주주의가 위축됐던 사실을 인정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박 후보와 함께 원외당협위원장협의회 워크숍에 참여한 이상일 대변인은 홍 대변인의 발언에 대해 “홍 대변인의 개인적인 견해인지는 몰라도 후보와 전혀 얘기가 안 된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선을 그었다. 박 후보도 이날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행사에 앞서 기자들의 질문에 “오늘은 인터뷰가 없다”면서 사실상 취재를 거부했다.
‘박근혜 위기론’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자 정치권에선 “박 후보 측이 국면전환을 위해서 승부수를 띄울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른바 ‘조기 승부수’를 던짐으로써 야권의 비판 공세를 분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는 친인척ㆍ측근 비리 근절을 위한 고강도 대책을 내놓으며 국면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안대희 정치쇄신특위원장은 “국회 추천의 독립적인 특별감찰관 등을 공약으로 제시, 친인척의 이권 개입을 원천봉쇄하겠다”고 밝혔다.
또 새누리당은 이르면 내주 중으로 경제민주화 플랜을 추가로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따뜻한 복지를 표방하는 박근혜식 복지를 통해 대선정국을 정치공방이 아닌 정책 이슈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박 후보의 조기 승부수는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원장의 대선 등판과 맞물릴 예정이어서 당 내부에서는 “내주를 기점으로 기선제압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새누리당 핵심 관계자는 “과거사 인식 문제는 조만간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라며 “우리 쪽에서 제2ㆍ3의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선은 인물 싸움이지 않느냐. 박 후보가 경제민주화 노선을 다시 들고 광폭행보를 하는 순간, 과거사 블랙홀은 신기루가 될 것”이라며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다 자신 있다. 이번 대선에서의 정권재창출 확률은 100%”라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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