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유지만 기자] ‘불법 선거개입’ 혐의를 받고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달 29일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원 전 국장이 조사를 받은 다음날인 지난달 30일,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국정원이 압수수색을 당한 것은 2005년 8월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의 불법도청 사건인 '안기부 X파일' 수사에 이어 두 번째다.
정치권과 사정기관 안팎에서는 원 전 국장이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정치개입’ 혐의는 원 전 국장에 대한 의혹 중 일부에 불과할 것”이라며 “결국 ‘MB 정리’의 일환 아니겠나”라고 밝혔다.
◆ 윤석열까지 붙잡으며 수사팀 맡겨

검찰은 이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기 위해 서울중앙지검 이진한 제2차장과 윤석열 여주지청장(전 중앙지검 특수1부장), 박형철 공공형사수사부장을 비롯해 공안부, 특수부, 형사부, 첨단범죄수사부 검사 6명과 수사관 등으로 구성된 30여명 규모의 특별수사팀을 구성했다. 이 중 윤석열 지청장의 경우 채동욱 검찰총장의 지시로 임시적으로 중앙지검에서 특별수사팀 업무를 보도록 했다. 검찰 관계자는 “윤 지청장은 채 총장이 각별히 아끼는 특수통”이라며 “(특수수사를)워낙 잘 하기도 하고, ‘성역 없이 수사한다’는 채 총장의 의지도 반영된 듯 하다”고 전했다.
◆ ‘원장님 지시·강조’ 문건 공개되며 시작된 파문
본격적인 검찰 수사에 앞서 민주통합당 진선미 의원은 지난달 18일 국정원 내부망(인트라넷)에 올려진 25건의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문건을 공개하면서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이 원 전 원장의 지시 하에 이뤄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진 의원은 “원 전 원장의 부임 직후인 2009년부터 올해 초까지 국정원 내부망 게시판에 최소 25차례에 걸쳐 올라왔다”며 “원 전 원장이 확대부서장 회의에서 강조한 말이 정리돼 올라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정원의 내부 문건이 공개되자 사건의 파문이 확산됐다. 그동안 ‘국정원 여직원 댓글’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는데, 이 문건의 공개로 순식간에 ‘정치개입’ 사건으로 정리됐다.
문서가 공개된 직후 원 전 원장에 대한 고소·고발도 이어졌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와 민주노총·전교조·4대강복원범국민대책위원회 등 시민단체들은 각각 원 전 원장을 국가정보원법 위반, 업무상 횡령, 명예훼손 등 혐의로 고소·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국정원 여직원 김모(여·28)씨는 자신의 아이디(ID)를 언론사 기자에게 제공한 인터넷사이트 ‘오늘의 유머’ 운영자 이모(41)씨를 고소했으며, 국정원도 댓글사건과 관련해 전 현직 직원 2명을 국가정보원직원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상태다.
김용판(55) 전 서울경찰청장이 수사에 외압을 행사한 혐의(직권남용)로 민주통합당으로부터 고발된 사건도 특별수사팀의 수사목록에 올라와 있다.
◆ 원세훈 결국 검찰 출석
사건이 확대되자 결국 원 전 원장도 견디지 못했다. 그동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원 전 원장은 지난달 29일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이에 앞서 25일에는 국정원 전 심리정보국장 민모씨를, 27일에는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을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했다.
원 전 원장은 14시간동안 조사를 받고 지난달 30일 귀가했다. 그는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기자들의 '정치개입 의혹을 어떻게 소명했느냐'는 질문에 "검찰 조사에서 충실히 답변했다"고 말했다.
또 '댓글 공작'을 지시한 의혹에 대해서는 "검찰에서 성실히 답변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할 것은 아니다"고 답했고, 심경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검찰은 지난 대선 당시 원 전 원장이 국정원 직원들에게 정권과 여당을 옹호하거나 야당을 비방하는 내용의 인터넷 댓글을 올리도록 한 이른바 '댓글 공작'을 지시한 사실이 있는지 등을 집중 추궁했다.
특히 원 전 원장의 개입 의혹을 불거지게 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과 관련해 그 의도와 배경에 대해 캐물었다.
아울러 원 전 원장이 직접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직제상 국정원 심리정보국장이나 3차장으로부터 사전·사후에 관련 보고를 받았거나 이를 알고도 묵인했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원 전 원장은 검찰에 출석하며 자신의 입장을 소명하는 별도의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지만 조사에선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고 차분히 혐의를 부인하는 취지로 진술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수사의 방향을 잡기 위해 원 전 원장을 조기 소환한 만큼 원 전 원장의 진술을 토대로 보강조사를 벌인 뒤 재소환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 탄력 받은 검찰, 국정원 압수수색까지
원 전 원장 등 이번 사건에 개입된 것으로 알려진 핵심 인물들에 대한 소환조사를 벌인 검찰은 이어서 국정원에 칼 끝을 들이댔다.
검찰은 원 전 원장이 소환조사를 마치고 돌아간 지난달 30일 오전 8시50분께부터 오후 10시25분까지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에서 심리정보국 등을 중심으로 13시간30여분에 걸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검찰은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 등과 관련해 국정원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정치·대선에 개입한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 임의제출 대신 압수수색을 선택했다.
압수수색 영장은 전날 법원에 청구해 이날 자정을 넘긴 새벽에 발부받았다. 국정원이 보안을 이유로 압수수색을 거부할 수 있는 법적 명분이 있기 때문에 사전에 압수수색과 관련된 절차나 협조 문제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압수수색은 현장 총괄지휘를 맡은 윤석열 특별수사팀장과 박형철 공공형사수사부장 등 검사 7명, 수사관 및 디지털포렌직 요원 등 총 25명이 참여했다. 박 부장은 2005년 당시 국정원 압수수색에도 참여한 바 있다.
검찰은 국정원 3차장 직속 심리정보국 등의 사무실을 중심으로 압수수색을 벌여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서버, 인트라넷과 관련된 각종 전산자료 및 내부 문건 등을 확보했다.
또 심리정보국 내부의 업무 분장, 조직운영 등과 관련된 자료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휴대전화와 노트북 등도 압수목록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 ‘MB흔적 지우기’ 시작됐나
검찰이 국정원까지 압수수색하며 수사의 강도를 높이는 데는 결국 ‘MB 지우기’가 작용한 것 아니겠냐는 시각이 많다. 형사소송법상 공무원의 직무상 비밀에 해당하는 물품을 압수하기 위해선 해당 기관의 승낙이 필요하다. 결국 남재준 국정원장이 압수수색을 승인했다는 얘기다. 사정기관 관계자는 “현행법상 국정원은 압수수색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원 전 원장의 혐의에 대해 국정원 측에서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 아니겠나”라고 내다봤다.
결국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과거 이명박 정권 시절 인사들에 대한 ‘정리’가 들어간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남재준 신임 국정원장이 취임한 뒤 지난달 12일 이뤄진 인사에서 1급인 실·국장과 지부장을 대폭 교체한 것으로 전해졌다. 남 원장은 30여명에 이르는 1급 인사 가운데 본부의 실·국장과 전국 11개 지부장 등을 포함해 80~90%까지 교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뿐 만이 아니다. 현재 국정원 안팎에서는 “3급 인사들까지 대부분 교체 될 것”이란 소문이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새로 발표된 인사에서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바로 감찰실장에 임명된 장호중 법무부 감찰당담관(46·차장검사)이다. 그동안 국정원에 파견 나간 검사들은 여럿 있었으나, 현직 검사가 1급의 감찰실장에 임명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국정원 감찰실장이란 자리는 정말 막강한 자리”라며 “국정원 내 각 파트에 나가 있는 국정원 감찰 요원들로부터 얻는 정보들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다”고 귀띔했다. 정치권과 사정기관 안팎에서는 “장 실장의 첫 임무는 원 전 원장에 대한 내부 조사일 것”이란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 수사 확대되면 걷잡을 수 없을수도
검찰 수사는 원 전 원장의 소환조사가 이뤄지면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채동욱 검찰총장도 “국정원 관련 의혹 사건 일체는 국민적 관심이 지대한 사건인 만큼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검찰 안팎에서는 MB정권의 실세까지 수사선상에 오를 것으로 관측하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원 전 원장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정기적으로 독대보고를 할 만큼 전 정권의 핵심 인물인 점을 고려하면 원 전 원장에 대한 수사 자체만으로 현 정부의 MB정부에 대한 청산 혹은 차별화로 비춰질 수도 있다. 때문에 검찰 내부에서는 원 전 원장에 대한 본격적인 소환에 앞서 기초자료 수집과 법리검토 등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검찰이 원 전 원장의 개인 비리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검찰은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과 함께 경찰의 수사 축소 의혹도 함께 캐낼 방침이다. 검찰은 국정원 댓글 사건의 수사 초기 실무 책임자였던 권은희(현 송파경찰서 수사과장)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제기한 경찰 수뇌부의 부당수사 개입 발언 및 수사 축소 의혹을 토대로 당시 수사 기록과 지난해 12월16일 경찰이 발표한 보도자료 등을 비교하면서 수사를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검찰 수사 과정에서 김 전 청장에게 사건 축소를 지시한 배후 세력이나 인물이 드러날 경우 사건의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후폭풍을 몰고 올 수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지난해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 재수사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매입 의혹 등에서 부실 수사, 정치 검찰 등의 비판과 오명을 쓴 검찰이 이번 수사를 명예회복의 기회로 삼고 총력을 쏟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검찰의 칼날이 MB정부의 턱밑까지 겨눌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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