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20)

김병윤 기자 / 기사승인 : 2022-03-11 23: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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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클럽. 카바레(댄스홀)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나이트클럽. 카바레(댄스홀)
나이트클럽과 카바레는 구분돼야 한다. 나이트는 술 마시고 춤추는 곳이다. 접대 여성이 준비돼 있었다. 속칭 호스테스라 불렸다. 본래 뜻과는 아주 다르게 사용됐다. 남자가 주를 이뤘다. 놀러온 여자와 짝을 이루기도 했다. 카바레는 오직 춤을 추기위해 생겼다. 무도장의 공간이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한국에서는 잘못된 인식이 있다. 본래의 뜻과 다르게 운영됐다. 주부가 많이 드나들었다. 장바구니를 맡겨놓고 춤을 췄다. 가정파탄 사건도많았다.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1960~70년대에 호텔이 많이 세워졌다. 호텔 맨 윗 층에 나이트클럽이 생겼다. 당시에는 그랬다. 조선호텔, 국제호텔에 나이트클럽이 개장했다. 수준 높은 나이트클럽으로 인정받았다. 국제호텔에는 유명 연예인이 활동했다. 길옥윤, 이봉조. 엄토미 씨가 악단을 이끌었다. 5인조 소규모 악단이었다. 길옥윤은 모든 악기를 잘 다뤘다. 이봉조는 색소폰의 권위자였다.

엄토미는 클라리넷의 달인이었다. 엄토미는 영화배우 엄앵란의 작은아버지이기도 하다. 음악인에게 나이트클럽은 주요 수입원이었다. 연습할 수있는 중요한 장소였다. 음악인에게 삶의 터전이었다. 다른 나이트클럽도 많았다. 뉴서울 나이트클럽. 지금은 없어졌다. 서울시청 부근에 있었다. 유엔센터, 아스토리아호텔, 대연각 호텔, 천지호텔에도 있었다.

나이트클럽은 경제부흥과 함께 번창했다. 한국은 1965년 월남전에 참전했다. 경제가좋아지며 돈이 시중에 많이 돌아다녔다. 갑자기 돈을 버는 사람이 많아졌다. 졸부들이 돈 쓸 곳을 찾았다. 나이트클럽은 그들을 목표로 했다. 나이트클럽의 성패는 단 한가지였다. 접대여성이 예쁘면 됐다. 졸부들은 불나방처럼 몰려들었다.

여성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나이트클럽의 경쟁이 치열했다. 최고의 마담을 데려오기 위해. 능력 있는 마담의 조건은 간단했다. 예쁜 여성을 많이 거느리는 것이다. 거래 손님이 많으면 됐다. 당시에는 마담이 접대여성과 함께 이동했다. 업계에서는 사단이라 불렀다. 거액의 스카우트비를 주며 유혹했다. 새로운 가게가 문을 열 때면 더 심했다. 뺏으려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동물의 세계 같았다. 돈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사업의 성패가 달려있었다.

나이트클럽계에 전설적인 여인이 있었다.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현수미였다. 물론 가명이다. 큰 사단을 끌고 다녔다. 뛰어난 미모의 여성이 사단을 이뤘다. 정말 미인이 많았다. 그 중에는 훗날 최고의 톱스타가 된 여인도 있다. 현수미가 가는 곳에 손님이 들끓었다. 벌떼처럼 현수미를 따라 다녔다. 뭇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모 저명인사의 무남독녀이다. 아버지도 낭만파였다. 문화 예술 스포츠 다방면에 뛰어났다. 의리파로 이름을 날렸다. 매너도 좋았다. 선후배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모든 민원을 해결해 줬다. 인맥이 탄탄했다.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게 술술 풀렸다. 술값도 혼자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어디를 가도 외상으로 내줬다. 두주불사였다. 낮에부터 술을 마셨다. 이런 일도 있었다. 후배를 데리고 술집으로 갔다. 처음 가는 술집이었다. 돈이 없었다. 외상을 하자고 했다. 안 된다고 했다. 양복을 벗으라고 했다. 정말벗었다. 새벽에 팬티 바람으로 뛰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 갚았다. 주인이 깜짝 놀랐다. 언제든 오시라고 했다. 단골집이 됐다. 서울시내 술집을 섭렵하며 다녔다. 유일하게 안 가는 곳이 있었다. 나이트클럽이었다. 딸과 마주치기 싫어서다. 애비의 애틋한 부성애였다. 현수미도 아버지와 같았다. 아주 예쁘고 상냥했다. 배짱이 두둑했다. 주위사람의 어려움을 못 봤다. 스스로 해결사 역할을 했다. 자신의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스스럼없이 밝혔다. 아버지도 딸의 직업에 무어라 하지 않았다. 맡은 직업에 충실하길 바랐다. 부전여전이다.

카바레의 효시는 국일관이다. 종로 1가에 있었다. 지금도 있다. 업종은 바뀌었다. 종로에는 다른 카바레도 영업을 했다. 1,2,3이었다. 속칭 원 투 쓰리라 불렀다. 타워호텔 카바레도 성황을 이뤘다. 대연각 호텔 무학성 카바레도 손님을 받았다. 1층에 있었다. 호텔에 카바레가 있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카바레의 대명사는 따로 있다. 미도파 카바레였다. 미도파 백화점 5층에 있었다. 박인수 사건으로 유명해졌다. 박인수는 1960년대 초반 카바레에서 만난 여인들과 간음했다. 불과 1년 사이에 70여 명의 여인을 농락했다. 박인수는 미도파를 비롯한 여러 카바레에서 여인들을 만났다. 박인수는 간음혐의로 구속됐다. 한국판 카사노바 사건이었다. 소설 자유부인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정비석 씨의 작품이었다. 법정의 판결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1심을 맡은 판사는 무죄를 선고했다.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사회적반향이 큰 판결이었다. 카바레는 아직도 부정적 인식이 크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음지에서 출발했다. 건전한 무도장으로 출발하지 못했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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