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4)

김병윤 기자 / 기사승인 : 2022-01-14 17:2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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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서울의 4대문과 4소문
서울에는 4대문이 있다.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숙정문(肅靖門.북문)이다. 동서남북 주요 지역에 자리 잡았다. 4대문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건축됐다. 유교의 핵심적 가르침인 오상(五常)을 따랐다. 오상이란 인(仁) 의(義) 예(禮 ) 지(智) 신(信)을 일컫는다. 4대문의 명칭 가운데에는 오상이 들어간다,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을 엿볼 수 있다.

4대문에 딸린 4소문도 있다. 4대문의 자문(子門)이다. 4대문의 보조 역할을 했다. 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이다. 4소문은 문들이 작다.

서울의 생활은 4대문을 통해 이루어 졌다. 4대문을 통해 들어오고 나갔다. 4대문의 주문(主門)은 숭례문이다. 4대문에도 굴곡이 많다. 화마에 휩쓸리기도 했다. 없어지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중국의 침략을 견뎌낸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혜화문(惠化門)’ 

▲흥인지문 사진 : 김병윤 대기자

흥인지문은 보물 1호이다. 원래는 흥인문이다. 1397년에 건립했다. 서울 도성 정동 쪽에 세웠다. 흥인 뒤에 지(之)자를 넣었다. 동쪽에서 오는 나쁜 액을 막기 위해서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것이다.

4대문 중 흥인지문만 4글자다.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 부른다. 우리에겐 치욕의 명칭이다. 일본에게 당한 아픈 사연이 숨어있다. 임진왜란 때다. 왜군에게 산하가 짓밟혔다. 왜군은 한양을 점령했다. 흥인지문을 통해 들어왔다. 왜군들은 한양 점령을 기념하고 싶었다. 흥인지문의 명칭을 바꿨다. 흥인지문을 격하시켰다. 동대문이라고. 동쪽 문으로 들어와서 그랬나보다. 우리의 정신을 말살하려 했다. 수백 년 전 일이다. 무섭고 소름이 끼친다. 아직도 우리는 동대문이라 부른다. 아무런 뜻도 모른 채.

일본인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다. 무의식 속에 일본의 잔재가 활보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정말 부족하다. 미흡하다. 일본인의 치밀함을 배워야 한다.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역사 찾기 운동으로 흥인지문이 돌아왔다. 아쉬움이 남는다. 대부분이 아직도 모른다. 동대문으로 부른다. 할 일이 있다.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하철 역 이름이 동대문역이다. 안내방송이 나올 때 가슴이 미어진다. 듣기가 싫다. 이해는 된다. 아픈 사연을 몰라서 그랬을 거다. 이제라도 바꾸자. 흥인지문 역이라고.

옛날에는 동쪽에 산소가 많았다. 미아리 공동묘지가 있었다. 흥인지문을 통해서만 갈 수 있었다. 백성이 주로 이용했다. 양반도 다녀야만 했다. 산소에 가기위해. 자연히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 백성은 양반을 피해 다녔다. 거드먹 거리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예나 지금이나 권세 있는 자들이 눈에 거슬리는 것은 똑같다.

흥인지문의 자문은 혜화문이다. 혜화문은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동대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미아리 방면 북쪽 사람들이 좋아했다.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이 짧아져서. 양반을 보지 않는 편안함은 덤이었다. 혜화문은 북악산성의 시작이다. 6.25때 불에 탔다. 지금은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1992년에 복원했다. 

 

유일하게 소실되어 아쉬운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소의문(昭義門)’

▲돈의문터 사진 : 김병윤 대기자
돈의문은 지금 볼 수 없다. 4대문 중 유일하게 없어졌다. 일제에 의해 사라졌다. 일제는 도로확장을 한다며 돈의문을 철거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일제는 우리의 문화유산마저 짓밟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돈의문은 상인이 주로 이용했다. 마포 용산에서 오는 상인이 주를 이뤘다. 그 지역 상인은 가까운 숭례문을 피해 다녔다. 숭례문은 양반이 자주 다녔다. 위세를 떨쳐가며. 숭례문은 검문이 심했다. 양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상인은 이런 모습이 보기 싫었다. 한국 사람은 통제 받는걸 싫어한다. 저항정신이 강하다. 권력의 통제에 강하게 맞선다. 돈의문은 흥인지문과 함께 서민의 통로역할을 했다.

소의문은 돈의문의 자문이다.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에 세워졌다. 서소문(西小門)이라고도 한다. 소의문도 평민이 많이 이용했다. 숭례문에 가기 싫은 사람이었다. 양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다. 소의문은 시신 운반의 통로 구실도 했다. 광희문과 함께. 소의문도 지금은 볼 수 없다.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돈의문과 함께 사라졌다. 일제가 헐어 버렸다. 그 부근의 성곽도 없애 버렸다. 서울을 지켜줬던 서쪽 문이 모두 없어졌다. 흘러간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빛바랜 사진이 그때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지금이라도 복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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