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14)

김병윤 기자 / 기사승인 : 2022-02-18 23: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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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심구이의 시초 '오륙도', 중식당 '취영루·중화루·태화관·아서원', 국내외 교류의 장 '외교구락부'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등심구이의 시초 '오륙도' 

▲ 소금구이의 시초 오륙도 <사진=김병윤 대기자>

다동에 있었다. 외식문화에 바람을 일으켰다. 새로운 맛을 알려줬다. 서울사람은 양념구이를 먹었다. 생고기 먹는 거를 상상하지 못했다. 오륙도가 모험을 했다. 생고기에 소금만 뿌려 구웠다. 양념장도 없었다. 소금 기름만 내놨다. 고기의 순수한 맛을 선보였다. 신선함을 줬다.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등심구이의 시초가 됐다.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성황을 이뤘다. 오륙도의 인기도 대단했다. 새로운 맛을 보려고 줄을 섰다. 자리가 없었다. 

 

지금은 등심구이가 대중화 됐다. 갈비도 생갈비가 비싸다. 양념갈비가 더 싸다. 왜 그럴까. 생고기는 속일 수 없다. 신선해야만 한다. 불신의 시대라서 그럴까. 양념을 가미하면 고기를 속일 수도 있다. 오륙도는 그런 면에서 큰일을 했다. 지금도 그때의 첫 맛을 잊을 수 없다. 첫 사랑의 입맞춤처럼.

중식당으로 유명했던 명소 '취영루·중화루·태화관·아서원'

▲ 주한중국대사관 인근의 중화요리 식당들 <사진=김병윤 대기자>

 

한국과 중국은 깊은 관계에 있다. 예로부터 그랬다. 중식당은 중국대사관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 동네에 차이나타운이 생겼다. 당시에는 대만이 중국을 대표했다. 자유중국이라 불렀다. 지금의 중국은 중공이라 칭했다. 이제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부른다. 명동2가에 있다. 대사관의 주인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바뀌었다. 건물은 그대로 있다. 대만과의 단교. 중국과의 수교로 상권도 변했다. 명동에서 북창동으로 바뀌었다.

중식당으로 유명했던 명소가 있다. 몇 곳이 대표적이다. 각 음식점마다 특색이 있다. 대표 음식으로 사랑받았다. 취영루는 물만두로 유명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부드러운 식감으로 입안을 녹였다. 담백한 만두속은 입맛을 돌아오게 했다. 만두에서 터져 나오는 국물 맛도 일품이었다. 먹기도 편했다. 한 입에 쏙 들어갔다. 

 

중화루도 빼놓을 수 없다. 탕수육이 대표음식이다. 겉이 바삭하다. 튀김의 정석을 보여주는 듯하다. 고기의 식감도 뛰어나다. 센 불에 바싹 튀겨내는 비법이다. 중화루에는 술손님도 많았다. 탕수육을 그냥 먹기 아까웠다. 술이 따랐다. 고량주였다. 탕수육에 고량주. 최상의 궁합이다. 

 

태화관도 있었다. 지금은 없다. 태화기독사회관으로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 말엽에 개업해 20여년 정도 운영했다.

1960년대에 제일 유명했던 중식당이 있었다. 아서원이다.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 다른 중식당처럼 대표음식이 없었다. 두루두루 잘했다. 다양한 중국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사교모임으로도 자주 이용됐다. 대표적인 커플모임도 이뤄졌다. 길옥윤 패티김의 첫 만남장소였다. 두 사람의 중매가 이뤄졌다. 아서원은 식당이자 사교 장소였다. 유명인의 사랑방 역할도 했다.

국내외 교류의 장 '외교구락부'

▲ 1960년대 외교구락부에서 열린 시정환담회 <사진=서울사진아카이브 제공>

 

구락부는 클럽을 뜻한다. 외교구락부는 아픔의 장소였다. 남산 중턱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헌병대장의 관사로 쓰인 장소였다. 1949년 정치인들이 힘을 모아 만들었다. 국내외 인사의 교류를 위해. 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윤치영 등이 힘을 합쳤다. 

 

서양식 레스토랑으로 문을 열었다. 외국 외교관이 주로 사용했다. 국내 정치인도 발걸음이 잦았다. 국무회의도 열렸었다. 교통이 불편해 승용차 이용이 필수적이었다. 남산 중턱까지 걸어가기가 힘들었다. 승용차가 귀한 시절이었다. 권력과 돈이 없으면 출입하기 어려웠다. 

음식 값이 가장 비쌌다. 한때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다. 보안문제로 출입이 까다로웠다. 일반인의 불만이 커져 나중에 다른 건물을 세웠다. 일반인의 출입을 위해. 외교구락부는 정치인만 사용한 게 아니다. 체육인, 예술인, 연예인, 종교인도 자주 찾았다. 

 

외교구락부는 1999년 문을 닫았다.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떠났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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