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최양수 기자] 튀니지 재스민 혁명으로 시작돼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번진 민주화 시위가 리비아에 불타오른 지 8개월여 만에 정착의 기회를 맞이했다. 중동을 휩쓴 민주화 시위 ‘아랍의 봄’으로 리비아 독재의 상징 무아마르 카다피 전 국가원수가 사망했다. 카다피는 ‘아랍의 봄’으로 사망한 첫 번째 지도자가 됐다. 마무드 지브릴 리비아 과도정부 총리는 지난 20일 카다피가 사망했다고 공식 확인했다. 이날 리비아 과도정부는 카다피가 사망했음을 미국에 통보했다고 미 정부 관리가 밝혔다. 이 관리는 과도국가위원회(이하 NTC) 측에서 리비아 주재 미 관리들에게 카다피 사망 소식을 전했다고 말했다. 42년여 간 리비아를 철권통치한 카다피는 결국 민주화 시위 발생 8개월여 만에 쓸쓸히 일생을 마감하게 됐다.
◇‘중동의 미친개’ 카다피, 고향 시르테에서 사망
42년 동안 리비아를 철권통치했던 ‘중동의 미친개’ 무아마르 카다피(69) 전 국가원수가 지난 20일 자신의 고향 시르테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카다피는 중동을 휩쓴 민주화 시위 ‘아랍의 봄’으로 사망한 첫 번째 지도자다. 마무드 지브릴 리비아 과도정부 총리는 이날 카다피 전 국가원수가 시르테에서 사망했다고 공식 확인했다. 지브릴 총리는 수도 트리폴리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카다피는 사망했다”고 밝혔다.
카다피는 시르테에 있는 건물 내에서 자신의 지지세력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 카다피는 리비아 남부사막 깊숙이 은신해 새 정부에 맞서 저항할 것으로 예상됐었다. 이날 알자지라 TV는 카다피 시신이 NTC군들에 의해 거리에서 끌려가는 모습을 전했다. 알자지라 TV는 셔츠가 벗겨진 반나체의 카다피 시신을 보여줬다. 카다피의 얼굴은 피로 얼룩지고 머리 옆 부분에 총상을 입었다. 알 아라비야 TV는 카다피의 시신이 시르테 인근 도시 미스라타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카다피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수도 트리폴리와 시르테, 바니 왈리드 등에서는 ‘신은 위대하다’는 외침 함께 축포가 쏘아 올려졌다. 또 차량들은 경적을 울리고 리비아인들은 거리에서 서로 껴안았다. 리비아 지도자들은 시르테 함락 이후 ‘해방’을 선언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리비아 과도정부는 카다피가 사망했음을 미국에 통보했다고 미 정부 관리가 밝혔다. 이 관리는 NTC 측에서 리비아 주재 미 관리들에게 카다피 사망 소식을 전했다고 말했다.
한편, 카다피 사망 과정에서 리비아 전 국방장관인 아부 바크르 유니스도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 카다피의 아들 무타심도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NTC의 모헤메드 부라스 알리 알 마크니 사령관은 카다피가 시르테 전투에서 부상으로 사망한 지 수 시간이 지난 뒤 무타심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모함마드 알 알라기 법무장관은 카다피의 둘째 아들로 한 때 후계자로 거론된 사이프 알 이슬람은 NTC군에 생포됐으며 다리에 총을 맞은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고 밝혔다.
◇리비아 사태, 카다피 죽음까지 과정
지난 8개월여 간 치열한 교전을 거듭하며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킨 리비아 사태가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사망으로 일단락됐다. 튀니지 재스민 혁명이 리비아를 관통한 것은 지난 2월15일.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시작돼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번진 민주화 시위의 불꽃은 결국 이날 리비아에서도 처음으로 불타올랐다.
리비아 제2의 도시 동부 벵가지에서는 2006년 이슬람주의자 집회 당시 희생된 14명의 유족들이 인권변호사 페티 타르벨을 석방해달라며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재스민 혁명과 함께 리비아 시민들을 자극했고 이후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42년 동안 의회 제도와 헌법을 폐기한 채 리비아를 독재해 온 카다피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카다피는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다. 군경을 앞세워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사망자는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시민들은 분노했고 무장으로 맞섰다. 리비아 반정부 시위가 내전으로 비화된 기점이었다. 반정부 시위가 처음 시작된 벵가지를 중심으로 시민들은 카다피에 대항한 무력 투쟁을 이어갔다. 카다피는 박격포와 헬리콥터를 동원하는 등 친위부대에 대대적인 시위대 진압을 지시했다.
반정부 세력은 3월 NTC를 설립해 조직적인 반(反)카다피 투쟁을 전개했다. 카다피 정권의 핵심 거점인 트리폴리를 향해 천천히 진격해 나갔고 이들은 ‘시위대’가 아닌 ‘반군’으로 통칭됐다. 하지만 카다피가 40년 이상 구축해 온 철옹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카다피군은 최신식 무기와 강력한 전략을 앞세워 벵가지를 향한 반격을 감행했다. 반군 사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벵가지에선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이에 유엔 안보리는 3월17일 카다피군의 민간인 학살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리비아 영공에 비행금지구역(NFZ)를 설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틀 뒤 프랑스 공군의 라팔 전투기가 리비아 상공에 출현해 카다피군의 탱크와 병력 수송 차량, 지대공 미사일 발사대, 지휘소 등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주축이 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을 중심으로 일부 아랍 국가들까지 참여한 공습이 강화되면서 카다피군의 군사력은 눈에 띄게 위축됐다. NTC는 3월23일 벵가지에서 임시정부 출범을 공식화했다.
이후 한동안 교착 상태를 이어가던 중 6월 말부터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나토군의 공습으로 카다피군의 전력은 점점 무기력해졌고, 국제사회는 미국과 유럽연합(EU) 주요 회원국들이 참여한 ‘리비아 연락그룹’을 구성했다. 7월 중순 리비아 연락그룹은 NTC를 리비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공식 인정했다. 서부의 전략 요충지인 자위야와 즐리탄을 차례로 접수한 NTC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트리폴리를 향해 계속해서 진격했고, 위기를 느낀 카다피군은 8월15일 처음으로 스커드 미사일까지 동원하며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토의 지원 속에 NTC군은 8월20일부터 트리폴리 함락을 위한 최후의 작전을 감행했다. 8월21일 수도 트리폴리에 진입한 데 이어 이틀 뒤에는 결국 카다피의 요새인 바브 알-아지지야가 반군에 함락되면서 전쟁은 시민의 승리로 끝났다. NTC군이 8월23일 트리폴리 전투에서 승리를 선언함에 따라 국제사회의 환영 메시지도 잇따랐다.
카다피는 독재자에서 도망자로 전락했다. 두 달여에 걸쳐 추격전을 펼치던 NTC군은 지난 20일 시르테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고 결국 카다피는 사망했다. 리비아 NTC 압델 마지드 믈레그타는 “시르테에서 붙잡힌 카다피가 생포 당시 입은 심각한 머리 등 부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유목민 아들에서 독재자의 죽음까지
카다피는 1942년 리비아 시르테 인근에서 베두인족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랍 민족주의자였던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 전 대통령을 존경하던 그는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뒤 군에 입대했고, 1969년 당시 27세의 젊은 나이에 쿠데타를 일으켜 이드리스 1세가 통치하던 리비아의 정권을 빼앗았다.
같은 해 9월 리비아 아랍 공화국을 건립한 카다피는 일명 ‘이슬람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부를 내세웠다. 그는 1977년 정부를 기존의 공화국에서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 아랍 민족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 체제로 바꿨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다피는 교육과 의료 혜택을 늘리는 민중을 위한 정책을 추구하고 대형 수로를 건설하는 등 기간산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카다피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카다피는 인민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구실로 의회 제도와 헌법을 폐기하고 전제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로 변해갔다. 자신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으며 시민들을 억압했다. 대외적으로도 각종 테러는 물론 반미 무장단체를 지원하는 등 서방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올해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리비아에서도 시위가 발생하자 카다피는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유혈진압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지원을 등에 업은 성난 시위대는 결국 수개월 간 이어진 내전 끝에 수도 트리폴리를 함락하고 카다피의 퇴진을 이끌었다. 이후 카다피는 도망을 거듭한 끝에 고향 시르테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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